세계의 명시/영국

영국시의 흐름

높은바위 2015. 3. 2. 10:36

 

앵글로 색슨의 문학은 그들의 3,000행의 서사시 <베이어울프>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6세기경 로마의 치하에 있는 영국에 침입할 때에, 그들의 원주지인 독일의 북부지방으로부터 전해진 이교도적 구전문학인데, 그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가필되어 10세기경에 이르러서 앵글로 색슨어의 사본으로 되어 현재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스칸디나비아의 왕자 베이어울프가 덴마크왕의 초청을 받고 괴물 그렌들을 퇴치한 후,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왕이 되었으나 불을 뿜는 용과 싸우다가 독을 마시고 쓰러지는 이야기로 된 무용담인데, 이 괴물은 게르만 민족의 원주지인 북구의 가혹한 대자연의 상징이고 베이어울프는 앵글로 색슨의 불요불굴의 의지와 강력하고 용맹한 투쟁력의 화신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 문학으로서는 캐드먼과 8세기 말의 키니울프의 종교시가 있다.

전자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후자는 <신약성서>를 재료로 하여 작시한 것인 바, 이 시들은 처음에는 대개 구전되어 오다가 후일에 이르러서 문장으로 기록된 것이다.

 

1066년 노르만 정복에 의하여 앵글로 색슨의 문물제도는 전복되고 그의 국어는 몰락되었다.

국가의 각 기관 · 학교 · 사원 등에서 Norman French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앵글로 색슨어는 평민계급 또는 토착민의 용어로 격하되었다.

이리하여 약 300년 동안 앵글로 색슨어는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아서 중세영어 현상을 일으키고 영문학의 공백시대를 이루었다.

 

11세기로부터 12세기에 걸쳐 노르만 사람들이 애호하는 로만스 문학이 유행되었으나, 별로 볼만한 작품도 없이 지내다가 13세기 초엽에 이르러서 영어로 쓰인 영문학이 부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1205년 라여몬의 32,000행으로 된 시 <브루트>와 1215년 경의 옴의 <오물럼> 1,000행의 시이다.

전자는 아더왕 전설을 재료로 한 것이고, 후자는 일종의 설교집과 같은 종교문학이다.

중세문학으로 말하면 약간의 서정시도 있지만 대체로 종교시와 설화문학의 두 갈래로 나뉘어 있다.

 

13~14세기를 통해서 이 두 문학계통을 찾아보면 종교시는 1215년의 <오물럼>에서 시작되어서 1320년의 <퍼일>에 이르고, 설화시는 1205년의 라여몬의 <브루트>에서 발단하여서 <킹혼>이나 <가이 워릭크>, 1370년의 가우어의 <연인의 고백>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초오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꽃을 피웠다.

초오서는 남방적인 설화시인으로서 프랑스 ·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랭런드는 북방적 시인으로서 사적과 도의상인 우의담을 써서 작품이라든지 인생관에 있어서 초오서와 대립한다.

그리고 랭런드의 <꿈>이 영국의 방방곡곡에서 애독되고 있던 1378년 경, 옥스포드 대학 교수 위클리프는 성서를 전부 영어로 번역해서 재래의 로마 교회의 교의를 일일이 시정하는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켰다.

이같이 영국문학은 자립할 입장에 놓였다.

 

우리는 1370년을 금일의 영국문화 및 영문학의 시초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1350년에 영어가 학교어로 허용되고, 1362년에는 영어를 법정어로 사용하는 입법조치로서 독립을 하게 되었다.

이같이 앵글로 색슨과 노르만이 서로 융합되어서 통일국가에 속하는 민족이며, 노르만 사람들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토를 상실하자 앵글로 색슨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말러리는 <아더왕의 일대기>를 써서 위에서 말한 아더왕의 전설을 집대성하여 후일의 영문학에 다대한 영향을 미치게 했다.

15세기는 특히 캑스튼의 인쇄술의 도움으로 문학이 민중에 접근하게 되고, 오래끌던 장미전쟁도 1485년에 끝나고 헨리7세가 등극하여 튜더 왕조가 시작됨으로써 중세영어시대는 끝난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약 150년 가량 늦어서 16세기 초엽에 인문주의자에 의해서 촉진되었다.

인문주의자의 학문 즉 휴머니즘은 그리스의 학예를 재흥하여 그것을 그리스도와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융합시켜 학문의 중용을 얻는 것이 휴머니즘 정신이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영문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의 시대 16세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조로서, 영국의 융성기였다.

셰익스피어 · 스펜서 · 베이컨 등의 위대한 문학가가 나와 영문학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의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영국 문예부흥의 정신인 중용의 도가 발견되는 수가 많다.

스펜서의 <신선여왕>에 묘사된 세계는 중세와 르네상스, 이교와 신교와 구교, 기타 모든 것을 포함한 선녀국이다.

다시 말하면 앵글로 색슨 정신과 지중해 문화의 정신, 초오서의 예술을 결합시킨 것이다.

셰익스피어를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도 그런 중용의 길을 표시하는 점에서다.

 

그렇게 백화난만하던 르네상스의 봄과 여름이 가고, 서리에 가슴이 싸늘한 퓨리터니즘의 가을이 왔다.

이 시대를 전시대와 비교하면 각 시대의 정신인 르네상스와 퓨리터니즘은 엘리자베스와 크롬웰이 각각 이것을 대표하고 양시대의 문학은 셰익스피어와 밀턴이 이것을 대표하게 된다.

그러나 전자에도 퓨리터니즘인 것이 있고, 후자에도 르네상스 감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조류의 운동은 모든 점에서 전연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는 이성의 해방이고, 타는 양심의 해방인 것이다.

스펜서의 <목자의 달력 노래>에 나타난 목가적 취미는 밀턴에게도 감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상은 그리스도교를 근본으로 했으나, 그의 신학사상은 상당히 자유스러웠고, 고전문학의 영향을 받은 바도 많고, 특히 미를 동경하는 마음은 르네상스의 정신과 다름 없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와 밀턴은 각각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외연적, 후자는 내포적이다.

전자는 인생이 이렇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그려낸 고금 독보적 천재이고, 후자는 인생이 이렇게 있을 이상을 보여준 대천재이다.

 

1660년 왕정복고와 동시에 낭만정신은 사라지고 문학의 조류가 일변되었다.

청교도시대에는 종교상으로 칼빈의 영향을 받았으나, 문학상으로는 외국의 사조에 끌린 일이 없었다.

그러나 왕정복고 후는 문예부흥기의 극단의 자유와 세기 초엽의 주지파의 형이상학시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문학의 정연한 시형과 법칙이 유행되었다.

영국인도 셰익스피어나 스펜서와 같은 극도의 자유스런 시인을 버리고 법칙에 의한 문학을 사표로 하게 되었다.

 

18세기 초기도 왕정복고시대와 마찬가지로 민중은 감정의 과도 · 격렬 · 광신자적 신념을 배척하고 냉정과 합리성을 자랑하고, 비방 · 냉소 · 풍자를 능사로 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한 18세기의 문학은 의고전주의 대표자 포우프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포우프의 문학은 풍자문학이다.

 

18세기 후반기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유주의 기반을 만들고, 문학에 있어서도 낭만주의의 저류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은 해외로 발전하고,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는 대혁명을 감행했으며,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소리는 문학상에 다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런 때에 전반기의 의고전주의 문학이 그대로 세력을 유지할 수 없고, 점점 반동의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자연을 노래한 제1기 시인 톰슨 · 션스튼 · 다이어 · 램지 · 콜린즈 · 그레이, 제2기 시인 쿠퍼 · 크래브 · 번즈 · 퍼시 · 채터튼 · , 신비 시인 블레이크 등에 의하여 19세기의 낭만주의의 개화는 한층 더 접근하여 왔다.

낭만주의의 제창은 워즈워드와 코울리지의 공저 <서정 가요집>의 출판에 기원한다.

전자는 처음에 프랑스 혁명에 동정했으나 행동의 문학을 단념하고 자연과 인생의 시인으로서 평이한 생활과 고원한 이상에 만족하고, 후자는 초자연의 신비적 시인으로서 워즈워드의 유일한 벗이고, 처음으로 독일 철학을 영국에 소개하는데 전력하였다.

바이런과 셸리는 다 혁명시인이기는 하나, 바이런은 문학상의 주의로서 오히려 포우프를 칭찬하고 워즈워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저 파괴를 위한 파괴, 혁명을 위한 혁명을 부르짖었을 뿐 그 이면에는 하등의 신념 · 개조 · 건설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셸리의 시의 정신은 사회개조에 대한 가능성과 순진한 이상의 세계의 실현을 기대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셸리가 천상의 현실미를 추구하는 반면에 지상의 현실미를 추구한 것이 키츠였다.

후자는 실로 미의 사도로 불리워졌다.

 

1837년의 빅토리아여왕 즉위부터 1900년 사거까지의 64년 간을 빅토리아조라고 한다.

1832년의 제1차 선거법 개정안 통과, 중산계급의 대두, 산업혁명에 의한 부의 증강, 강대한 해군력에 의한 동서양 각지의 영토확장 등으로 영국은 <24시간 해가 지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 문학가는 테니슨과 브라우닝의 양대 시인인 바 전자는 상식적인 당면의 문제를 처리하고, 후자는 인간성에 대한 흥미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의 사상을 대담하게 노래했다.

 

20세기 초엽에 영국 문예계에 새로운 학설이 하나 소개 된 바, 그것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상으로 본 <문예작가의 유전적 변태성욕론>이다.

그는 문예계의 천재는 대개 그 신경조직이 선천적이고 성욕변태형을 가진 일종의 성적 광인이라고 과학적으로 추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그의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되어 문학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하나의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아일랜드의 문예운동은 켈트족의 토속문학을 영문학에 가미했다.

예이츠 · 싱그 · 그레거리부인 등이 그의 유력한 인사로서, 더블린의 애비극장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활동은, 당시 맹렬히 진행하고 있던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공헌한 바가 많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문단의 주류를 지배한 작가는 엘리어트 · 조이스 · 로렌스 · 울프 · 헉슬리 등이다.

이들 각자는 특이한 점도 있으나, 공통적인 특징은 과거 질서의 붕괴감과 거기에 따르는 회의 · 불신 · 비꼼, 더 나아가서는 문제의 근본에까지 파 내려가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점이다.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유럽의 황폐를 노래한 반면, 고전에 친숙하고 현대인의 생명있는 전통의 진정한 의미를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로렌스는 독자의 천재적인 직감으로서, 일체의 과거의 인습을 거부하고, 원시적 생활을 찬미하고, 기계화된 현대 문명 밑에서 인간 회복의 필요를 부르짖었다.

그 외에 파운드가 있고, 루이스가 있고, 리처드슨이 있고 해서 1920년대의 영문학은 참으로 다채로운 바가 있었다.

 

1930년대에 들어가서 로렌스가 죽은 뒤로 문단의 형세가 일변했다.

그것은 직접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의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오든 · 스펜더 · 루이스 · 맥니스 · 이셔우드 등이 그들이다.

시에 있어서 엘리어트 · 오든의 지성주의의 경향과는 달리, 신화라든가, 상상력이든가를 자유로 구사하는 로맨틱한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개시 직전에 트리스 · 프레이저 · 헨드리 등이 시작한 <새로운 묵시록> 운동에 나타나 있으나, 그것과는 달리 이 경향을 대표한 시인은 토머스와 바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