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와 시를 써서 원래 시인으로 출발했던 황순원은 소설에도 뛰어났죠.
그의 소설 중에 '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분노를 못 이겨, 맞싸워 이길 수는 없지만 굴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주인공 동호가 나오는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둘이는 다방을 나와 거기서 과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단골집으로 갔다. 간판도 없는 여염집으로 대개 한 번 왔던 손님이 찾아오는 술집이었다."
우리가 '여염집 아낙', '여염집 규수' 등 이런 말을 자주 접하는데요.
여기에 나오는 '여염집'이란 말은 '보통 백성의 살림집'으로 '백성들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여염(閭閻)'이라 한 데서 나온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괜찮은 '여염집'을 보고서 '요양을 한다'거나 혹은 '집을 빌려 혼사를 치른다'는 등의 명목으로 곧바로 가솔들을 이끌고 안채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살던 여인네들이 마치 난리라도 만난 것처럼 도망치고, 새로 들어온 사람은 마치 원래 자기 집처럼 태연히 거처하였고, 그 집에 비축해 둔 곡식과 가마솥 등을 그대로 쓰면서 혹은 해가 바뀌도록 나가지 않는데, 집주인은 밖에서 노숙하면서도 괴롭다는 말 한마디 못하였지요.
이렇게 집을 뺏긴 '여염집'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니, 조석으로 끼니를 때울 뿐 아무것도 비축할 것이 없었습니다.
영조왕이 세자일 때 이러한 폐단을 잘 알고는 즉위한 뒤에 법을 만들어 이를 엄금하였지요.
그리하여 남의 집을 빼앗아 들어간 사람은 3년 동안 유배 보냈으며, 이에 평민들이 비로소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지나치게 바로잡는 바람에 그 폐단으로 재상이 '여염집'에 임시 처소를 정하고자 하여도 저지당하고, 몇 칸짜리 초가집도 '여염집'이라고 하면 양반이 매입할 수 없게 되었지요.
가난한 양반이 그런 집을 샀다가 발각되면 곧바로 유배를 당하여 양반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에 정조왕이 대신들의 주청을 계기로 기와집인 경우에는 11칸 이하, 초가집인 경우에는 칸 수에 상관없이 매매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무단으로 빼앗는 경우는 법률대로 금하였고요.
이렇게 '여염집'은 '일반 사람들의 살림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줄여서 '염집'이라고도 하는데, 자칫 '시체를 염하는 집'으로 잘못 알기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