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독일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

높은바위 2024. 8. 9. 07:54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사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는 '아이세여, 내 너를 사랑했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 가를 왔다 갔다 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휠더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롱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은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 향기는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노목(老木)이 서 있던 나의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있는 몸이 되었을 때.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에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모 씨의 강연 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친구였지.

허구한 날을 도회(都會)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커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날,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느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때 당신은 불현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논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 살던 조그만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 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이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것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은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 현.

가을밭에서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져있는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 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아이들의 모습.

철창 안에 보이는 죄인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는 하얀 눈송이 - 이 모든 것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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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비록 산문이지만 글 속 이미지가 시처럼 아름답다.
 

안톤 슈나크를 슬프게 하는 대상은 특별하지 않다.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이 지나간 추억의 부스러기들이 그로 하여금 마음에 울림을 준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1953년 처음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등장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인의 마음을 이 단편이 어루만져 주었다.

당시 글은 일본 호세이대(法政大)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수필가 김진섭(金晋燮·1903년 8월 24일 ~?, 1950년 6.25 때 납북)이 번역했다.

김진섭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번역한 1936년은 베를린올림픽으로 뜨거운 해였다.

나치 제국의 역량이 총결집된 축전에서 일장기를 단 마라톤 선수 손기정과 남승룡이 월계관을 썼다.

공교롭게도 손기정은 김진섭의 학교 후배였다.

그다음 올림픽은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일본이 중국과 아시아 전역을 침공하는 바람에 취소됐다.

우리를 슬프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언론인 김성우(金聖佑)는 자신이 파리 특파원으로 있을 때 안톤 슈나크의 고향을 찾아갔던 기억을 더듬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칼’이란 조그만 마을에서 살다 간 안톤 슈나크를 독일인들은 거의 기억하지 못하더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의 글이 30년 가까이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이 이국(異國)의 무명작가가 한국인에게 문장을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교과서에서 사라진 것은 1982년 무렵이다.

제4차 교과서 개편으로 사라졌는데 김성우 씨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교과서에서 추방당한 것은 그야말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서 명문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인데, 우리를 즐겁게 하던 문장들이 퇴장했다”라고 말했다.

교과서 영향 때문인지 많은 문인이 ‘우리를(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소재로 글을 썼다.

시집이나 에세이의 단골 메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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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슈나크(Anton Schnack, 1892년 7월 21일 ~ 1973년 9월 26일)는 독일의 시인, 소설가, 언론인으로 프레드리히 슈나크의 동생이다.

안톤 슈나크는 1892년 독일 프랑켄 지방 리넥에서 태어났다.

그는 뮌헨에서 문학, 음악, 철학을 공부한 뒤 신문사 문예담당 편집장을 지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 미국의 전쟁포로가 됐다가 풀려났다(이를 두고 나치에 협력한 문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처음에는 시를 썼으며 나중에는 소설과 수필로 영역을 넓혔다.

짤막한 산문(Kleinprosa)을 즐겨 발표했다.

엉뚱하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이 드러난 작품이 많다.

 

시대의 조류에 초연하여 고아한 정적의 경지를 지켰다.

1919년 〈욕망의 노래〉로 문단에 데뷔했고,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1936년 〈조우자로부터의 소식〉에서 새로운 낭만풍의 시경을 개척하였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1941년 펴낸 수필집 《젊은 날의 전설(Jugendlegende)》에 실렸다.

그 밖에 소설로는 장편 《사랑의 후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