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그외 나라

아르헨티나: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높은바위 2024. 4. 28. 03:52

 

축복의 시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심경을

신은 빛을 잃은 이 눈을

책들의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네

꿈들의 도서관에서 새벽이 건네는

초점 잃은 구절들밖에 읽을 수 없는 이 눈을

낮은 헛되이 끝없는 책들을

이 두 눈에 선사하네

알렉산드리아에서 소멸된 필사본들처럼

읽기 힘든 책들을

그리스 신화에서는 어떤 왕이

샘과 과일나무들 사이에서 갈증과 허기로 죽었지

나는 이 높고 긴 눈먼 도서관의 이곳저곳을

길을 잃고 헤매네

벽들은 백과사전, 지도책, 동방과

서방, 모든 세기들, 왕조들,

상징들, 우주와 우주 이론들을

건네지만 모두 무의미하네

도서관을 낙원으로 상상하곤 하던 나는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나의 어둠에 싸여 천천히

공허한 어스름 속을 탐색하네

단지 우연이라는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이 일들을 주재하리니,

다른 누군가가 또 다른 어슴푸레한 날들에

수많은 책과 어둠을 건네받았지

느린 복도를 걸어갈 때

나는 성스러운 두려움을 느끼네

내가 그 다른 사람이며,

나는 이미 죽고 없는 것이라고

내가 내딛는 발걸음은 그의 것이라고

그 여럿인 나와 하나의 어둠인 나,

둘 중 누가 이 시를 쓰는 것일까

어차피 저주가 같은 것이면

내가 어떤 이름이든 무슨 상관인가

내가 그루삭이든 보르헤스이든,

나는 이 소중한 세상이 형태를 잃고

그 빛이 밤의 잠과 망각을 닮은 창백하고

불확실한 재로 꺼져 가는 것을 응시하네

 

​ * * * * * * * * * * * * * *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년 8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1986년 6월 14일 스위스 제네바)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1899년 8월 24일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이하 편의상 ‘보르헤스’로 지칭한다.) 영국 출신인 친할머니의 영향 때문에 어려서부터 집안에서는 ‘호르헤’가 아니라 ‘조지’로 호칭되었으며, 영국인 가정교사에게 기초 교육을 받았다.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더 먼저 말하고 읽었던 유년기의 이중 언어 체험은 훗날 보르헤스의 영어권 문화에 대한 애착, 그리고 세계시민적인 사고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보르헤스는 9세 때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를 에스파냐어로 번역해서 신문에 투고했다. 이때 번역자의 이름이 ‘호르헤 보르헤스’라고만 실리자, 사람들은 이 신동의 아버지 ‘호르헤 기예르모 보르헤스’에게 찾아와 번역이 훌륭하다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보르헤스 부자에게는 이름과 문학적 소질 말고도 또 한 가지 불운한 공통점이 있었다. 대대로 이 집안의 남자들에게는 시력이 약화되어 결국 상실되는 유전적 질환이 있었던 것이다.

1914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시력의 약화로 변호사 업무를 그만둔 가장의 치료를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난다. 보르헤스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에 몇 년씩 머물면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부터는 에스파냐에 살면서 모국어인 에스파냐어 구사 능력을 더욱 향상했다. 이 시기에 그는 당시 에스파냐에서 유행하던 아방가르드 문예 사조인 울트라이스모(극단주의)에 심취했으며, 그 방면의 문인들과 교제하며 습작을 시도했다.

1921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7년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온다. 유럽 문화계의 최신 유행을 직접 체험하고 돌아온 보르헤스는 간결성과 압축성을 강조한 울트라이스모 운동을 아르헨티나 문단에 전파하는 한편, 첫 시집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1923)를 펴내서 좋은 평가를 얻는다. 1923년에 보르헤스 일가는 다시 한번 유럽으로 떠난다. 역시나 부친의 치료를 위한 이번 체류 동안에 보르헤스는 다시 한번 유럽 문화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경험하는 기회를 얻는다.

 

1924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보르헤스는 자신의 경력에서 중요한 몇 사람을 만나게 된다. 우선 문화계의 큰 후원자였던 빅토리아 오캄포가 이후 권위 있는 문예지로 성장한 <수르(南)>를 창간하고 보르헤스를 공동 편집인으로 초빙한다. 빅토리아의 동생이며 역시 작가인 실비나 오캄포, 그리고 그녀의 남편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역시 보르헤스와 절친한 사이가 되어서 여러 권의 공저를 펴냈다. 특히 카사레스와 보르헤스는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합작하는 실험을 벌이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편집자로 일하면서 칼럼을 기고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소설 창작을 병행하면서 최초의 단편집 [불한당들의 세계사](1935)를 펴낸다. 1935년에 보르헤스는 한동안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고, 여름의 더위까지 가세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나머지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발로 목숨을 건진다. 이미 30대 중반이었던 그는 문단에서 제법 명성을 얻었지만, 부친의 실명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37년에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미겔 카네 시립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한다. 업무가 간단한 대신 월급도 많지는 않았으며, 문학에는 무지한 동료들로부터 냉대까지 감수해야 했지만, 그 대가로 그는 지하 서고에서 혼자 책을 읽으며 창작에 몰두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1938년에는 중요한 사건이 두 가지 벌어졌다. 하나는 부친이 결국 사망한 것이었고, 또 하나는 시력이 약한 보르헤스가 계단을 오르다 열어놓은 창문에 머리를 부딪친 후유증으로 한 달 가까이 병석에 누운 것이었다.

이때 그는 병석에 누운 상태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종이에 옮겼고, 그 작품이 바로 <수르>에 발표된 단편소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작가’(1939)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된 ‘보르헤스적 단편소설’들은 1941년에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으로 엮여서 간행되었으며, 그 증보판이 1944년에 [픽션들]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됨으로써 보르헤스의 명성을 굳혀주었다. [픽션들]은 [알렙](1949)과 함께 보르헤스의 문학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집으로 손꼽힌다.

1940년대의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격변을 연이어 맞이하고 있었다. 보르헤스와 동년배였던 군인 후안 페론이 1943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고, 급기야 1946년에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페론과 그의 아내(그 유명한 ‘에비타’)에 대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찬반양론이 엇갈리지만, 대중에 영합하는 선심성 정책을 남발한 나머지 훗날 경제 파탄의 원인을 제공하고 자유를 억압한 독재자임은 분명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성공 사례를 주목한 페론은 아르헨티나에서도 일종의 국가사회주의를 주창했다. 보르헤스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지식인들은 페론에게 반대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책이며 지식인에 대한 멸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던 페론으로부터 도리어 거센 반격을 받게 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국 선언문에 참여한 지식인 중에서는 보르헤스가 일종의 본보기로 선정되어 특별히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1946년에 도서관 사서였던 그에게 동물시장의 가축 검사관이라는 엉뚱한 직책으로 전보 발령이 내려왔던 것이다. 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보르헤스는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47세의 나이에 갑자기 실직자가 된 보르헤스는 생계를 위해 대중을 상대로 문학 강연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강연 원고를 쓰느라 잠을 못 이루는가 하면, 심지어 강연장에 들어서기 직전에 독한 술을 한 잔 마셔서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지만, 그는 점차 강연에 익숙해지게 되어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림과 동시에 안정된 생활도 누리게 된다. 독신에다가 점차 눈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보르헤스는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독서와 집필 같은 업무에서도 연로한 어머니에게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강연과 기고로 명성이 점차 높아지면서, 보르헤스는 활발한 집필 활동에 돌입한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단편집 [알렙](1949)과 산문집 [또 다른 심문](1952), 그리고 1950년대부터 나온 여러 동료 작가들과의 공동 편저서가 있다. 페론은 1951년에 재선에 성공하지만 이듬해에 ‘에비타’가 사망하면서부터 급격히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5년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페론은 해외로 추방되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정치 및 경제 분야에서는 불안과 혼란이 그칠 줄 몰랐다.

 

보르헤스는 새로운 정권의 배려로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된다. 이 파격적인 조치는 그가 10년 전에 페론 정권의 입김으로 시립도서관 사서직을 그만둬야 했던 굴욕에 대한 보상인 셈이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미 거의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1927년부터 무려 8회나 안과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가계에 흐르는 실명의 저주를 피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무려 80만 권의 책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정작 단 한 권의 책도 읽을 수는 없었던 아이러니를 그는 ‘축복의 시’(1958)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누구도 눈물이나 비난쯤으로 깎아내리지 말기를.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신의 경이로운 아이러니, 그 오묘함에 대한
나의 허심탄회한 심경을.

신은 빛을 여읜 눈을
이 장서 도시의 주인으로 만들었다.
여명마저 열정으로 굴복시키는 몰상식한 구절구절을
내 눈은 꿈속의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을 뿐.

 


1961년에 보르헤스는 사무엘 베케트와 공동으로 제1회 국제 출판인협회 작가상을 수상한다. 이로써 뒤늦게나마 전 세계가 보르헤스에게 주목하게 된다.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수상과 강연 제의가 이어지자, 보르헤스는 어머니와 함께 지칠 줄 모르고 여행을 다녔다.

1967년에는 무려 68세의 나이로 10세 연하인 엘사 아스테테 미얀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30년 전에 처음 만났지만, 엘사는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미망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성격 차이로 인해 불과 3년 만에 이혼하고 말았다.

1973년에는 페론이 다시 권좌로 복귀하는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정치적 역풍 속에서도 보르헤스는 다행히 국립도서관장으로서의 임기를 다 채우고 퇴임한다. 이 즈음에 그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공인’으로서의 삶에 지쳐 있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보르헤스이기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심지어 ‘1983년 8월 25일’라는 단편에서는 그날 자살하겠다는 의향을 암시하기도 했다(물론 실제로는 자살하지 않았고, 그 이유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겁쟁이라서”라고 웃으며 대답하곤 했지만.)

1975년에는 보르헤스의 어머니가 98세로 사망한다. 이후로 그는 38세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에게 크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1985년 말에 강연 차 유럽으로 온 보르헤스는 이듬해 1월 26일에 스위스 제네바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4월 22일에는 코다마와 혼인신고를 올렸는데, 이 결혼은 사실상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리가 전 부인에게 넘어가는 일을 막으려는 조치였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1986년 6월 14일, 보르헤스는 87세를 일기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여 그곳의 한 묘지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