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독일

베르톨트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높은바위 2023. 3. 1. 03:37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난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내가 미웠다.

 

 * * * * * * * * * * * * * *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 * * * * * * * * * * * * *  

 

브레히트가 1942년 초에 쓴 시다. 

이 시의 원제는 <, 살아남은 자>인데, 우리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김광규 시인의 번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불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군대에 끌려가고, 정신이상이 되고, 불구가 되었다. 

그런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쓴 이른바 '후일담' 문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고, 이 시도 그때 같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4행으로 된 짧은 시이고 평이한 시로 보이지만, 마지막 행 "그러자 내가 미웠다"에서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시이다. 

왜 내가 미워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1행에서 '내가 아는 것' 2~3행에서 '꿈속에서 들은 말'이 다르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꿈속에서 말하는 친구들은 누구일까

'아는' 의식 차원의 '나'와는 '다른 나', '무의식의 나' 아닐까? 

'나'는 나치의 박해와 전쟁에서(또는,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그런데 브레히트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긍정하지 않았던가?) 내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더 강해서'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의 생존의 이유를 나 자신의 힘으로 돌리는 '나'. 

그렇다면 '살아남지 못한 친구들'은 그들이 '덜 강해서' 살아남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무의식에서라도 일어나는 '나'라면, 그런 '나'는 증오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

'부끄러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미워한다/증오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hassen"을 썼기 때문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 * * * * * * * * * * * * *  

 

* 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독일 민주공화국 동베를린에서 58세로 사망했다.

그는 독일의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이며 시인으로도 활동했었다.

독일문학계에서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이름이며 독일문학을 넘어 그야말로 세계 연극계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사람이다.

그가 남긴 무수한 작품들은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연구대상이며 무대에 올려지고 있으며, 그의 극작론은 연극계를 넘어 다른 학문분야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