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ㅂ

바람(風)(4)

높은바위 2025. 3. 23. 06:51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 바람은 가변성과 역동적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성을 일깨워주는 촉매가 되는가 하면 자유와 방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 바람은 수난과 역경, 시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바람은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 마음이 이끌려 들뜬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내 고향은 이북이지만

꿈 속엔 길이 있어서 갈 수가 있읍니다.

어릴 적 그때와 다름없이

밝은 고향집엔 이남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이남에서 꾸는 꿈속의 길을 타고

이북의 고향집을 찾아가서 부모님을 만나 뵈옵니다.

한식날 밤이거나 추석날 밤이면 꼭 그러합니다.

더러는 비 오는 밤이거나 눈 오는 밤에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 가을 찬 바람 부는 한 저녁에

나는 문득 난감한 생각을 떠 올렸읍니다.

 

다름이 아닙니다.

나도 이남에서 죽어 묻힐 것이 뻔하고

그리되면 부모님이 그러하였듯이

나 역시 꿈길로나 찾아가던

이북의 고향집에 돌아가서 살 것이 틀림없읍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풀 길 없는 어려움은 비롯되는 것인즉

그것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내가 이남에서 낳은 두 자식은 이남이 제 고향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은 장성하도록 가 본 적 없는

제 아비의 고향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저들은 아비가 죽은 뒤 어찌 꿈 속에서나마

제 뿌리요 제 아비의 고향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며

제 아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또한 그러하니 그 아비는 어찌 제 자식들을

다시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마침내 이 땅에서는 죽으면 그냥 영이별인 것입니다.

죽은 아비와 산 자식들은 꿈 속에서조차도

다시 서로 만날 길 없는 영영 영이별인 것입니다.

가을 한 저녁 불기 시작한 찬 바람은

밤새껏 그치지를 아니하였읍니다. (전봉건, '찬바람', "북의 고향", p. 26)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중략)......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백금) 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化粧(화장)도 解脫(해탈)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황동규, '風葬풍장· 1', "악어를 조심하라고?", p. 43)

 

 

바람 부는 날은 눈이 부신 날

강변엔 사과꽃 흩날리고

발 아래 강물은 바닥에 잠든 은빛 강을 배로 밀며

또 몇 리를 흘러 갔다

이런 날 여인은 홀로 산 언덕 올라

아기 강이 짧게 소리치며 흘러간 곳을 바라본다 (이시영, '바람 부는 날', "이슬 맺힌 노래", p. 48)

 

 

저 나무에 바람 인다

잎새여 나부껴라

너 진 뒤 거센 바람 고요 뒤에 그 얼마 뒤에

우리 아기 연초록빛 발가락이 물든다 (이시영, '바람', "이슬 맺힌 노래", p. 39)

 

 

말라 비듬되어 흩어진 몸처럼

목소리조차도 먼지가 되어 쌓였다네

바람불 때마다 일어나 울며

먼지들은 다시 소리가 되려 한다네

바람이 알맞게 흩뜨려 놓으면 또 쌓여서

사람들은 매일 털고 쓸고 닦아야만 한다네

...중략...

찢어지는 천막과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면

오오 놀라워라

먼지의 이동이 가는 소리의 떨림이 저토록 힘이 셀 수 있단 말인가 (김기택, '바람에 대하여', "태아의 잠", p. 66)

 

 

나라의 운명이 바람이라면

그의 운명

어찌 바람의 길 아니랴

그는 그 길을 가야 했다 허우룩하건만 (고은, '황진 만리', "백두산· 3", p.24)

 

 

매운 바람이여 바람이여

전우의 송장 하나 지고

나는 바람에 파묻히며 돌아가리라

역사는 싸움만이 만든다

바람이여 바람이여 역사여 (고은, '바람과 함께', "고은시전집· 2", p. 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