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ㅂ

바다

높은바위 2023. 9. 11. 07:56

 

지구 위의 육지를 둘러싼, 짠 물이 괴어 있는 크나큰 부분. 바다는 무한히 창조적인 생성력과 모성성으로 인하여 여성 또는 미지의 세계를 상징하기도 하고 광활함과 적막함을 표출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한편 바다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며 이승과 저승이 하나가 되는 신화적 상상의 공간으로 상징된다. 바다는 거대하고 역동적이며 생명력이 넘치는 물이다. 파도의 끊임없는 출렁거림으로 인해 바다는 가변성과 생기 넘침, 싱싱한 생산력과 활동력으로 이미지화되는 경우가 많다. 바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이 지닌 존재적 왜소함과 본질적인 물음, 심연의 고독과 마주하게 된다. 또한 바다는 삶의 의지와 인고를 배우는 깨달음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뛰노는 흰 물결이 일고 또 잣는

붉은 풀이 자라는 바다는 어디

 

고기잡이꾼들이 배 위에 앉아

사랑노래 부르는 바다는 어디

 

파랗게 좋이 물든 남빛 하늘에

저녁놀 스러지는 바다는 어디

 

곳없이 떠다니는 늙은 물새가

떼를 지어 좇니는 바다 어디

 

건너서 저편은 딴나라이라

가고싶은 그리운 바다는 어디 (김소월, '바다', "진달래꽃", p. 19)

 

바다는 뿔뿔이

달아날랴고 햇다.

 

푸른 도마뱀떼같이

재재발럿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흰 발톱에 찢긴

珊瑚(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앨쓴 海圖(해도)에

손을 싯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희동그란히 바쳐 들었다!

地球(지구)는 蓮(연)닢인 양 옴으라들고 펴고 (정지용, '바다 · 2', "정지용시집" p. 5)

 

 · 오 · 오 · 오 · 오 · 소리치며 달려가니

오 · 오 · 오 · 오 · 오 · 연달어서 돌아온다.

 

간 밤에 잠 살포시

머언 포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썩, 처얼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어들 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정지용, '바다 · 1', "정지용시집" p. 84)

 

 

'밤낮으로 나를 불러 마지 않는 먼 먼 사랑의 달래움이여.

내 비록 잘못되어 육신은 동산에 누웠을지라도 영혼은 거기 있을 어머님이여' (유치환, '바다', "예루살렘의 닭", p. 34)

 

바다는 푸른 띠를 두른 세계주의자

지구를 하나로 안으려 한다. (조병화, '바다', "외로운 혼자들", p. 74)

 

청비단 이불 위에

날마다 발가벗고 누워서

아득한 하늘만 유혹하다가

시퍼런 욕정을 숨길 수 없어

제풀에 몸이 달아 자지러지듯

이리저리 뒤척이는 그녀를 보면

나도 문득 그 옆에 가 눕고 싶어라. (임영조, '바다', "그림자를 지우며", p. 51)

 

하늘로 높이

하얀 옷처럼 떠오르려는 물결과

어깨를 부딪치는 쾌감으로 밀려가는 물결이

흐르는 시간 속에 서로 만나는

군청빛 바다는 神(신)의 織物(직물).

올을 짜고 푸는 일에 익숙한 손의

즐거움과 근심이 함께 어리어 (이수익, '바다', "단순한 기쁨", p. 11)

 

 

바다여

너는 人間(인간)의 뜰이다

 

너의 빛깔 너의 움직이는 물결은

知慧(지혜)의 매스를 쌓아올린다

황금 장미밭에 우리가 노닐 제

끌어당긴 활시위

너의 기슭 너의 출렁임

너의 폭포는

可能(가능)의 언덕들을 열었노라

 

西(서)유럽을, 南(남)아프리카를,

東(동)아시아를, 北(북)아메리카를,

 

아메리카엔 아메리카 사람이 산다

아시아엔 아시아 사람이 산다

아프리카엔 아프리카 사람이 살고

유럽엔 유럽 사람들이 산다

 

그러나 순수한

인간의 세계는 하나다

바다여 크낙한 꿈꾸는 꽃섬 더미에로

우리들 逍遙(소요)케 하라 (신석초, '바다여', "신석초시전집", p. 215)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往來(왕래)하나

길은 恒時(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아-- 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우름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無言(무언)의 海心(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같은 心臟(심장)으로 沈沒(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情熱(정열)에 넘쳐

둥그란 하눌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구멍 뚤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兄弟(형제)와 親戚(친척)과 동모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沈沒(침몰)하라. 沈沒(침몰)하라. 沈沒(침몰)하라!

오-- 어지러운 心臟(심장)의 무게 우에 풀닢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뜨라. 사랑하는 눈을 뜨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東西南北(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國土(국토)가 있다. →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푸리카로 가라! (서정주, '바다', "미당 서정주시전집", P. 55)

 

너 얼마나 깊은 悔恨(회한)이기에, 너 얼마나 큰 괴롬이기에, 아닌 듯 겨우 물거품 지우는다?

찬 바윗돌에 가슴을 비비는다?

 

바다야, 너 바다야. (김달진, '바다', "올빼미의 노래", P. 109)

 

 

一.

화안한 꽃밭같네 참.

눈이 부시어, 저것은 꽃핀 것가 꽃진 것가 여겼더니, 피는 것 지는 것을 같이 한 그러한 꽃밭의 저것은 저승살이가 아닌 것가 참. 실로 언짢달 것가, 기쁘달 것가.

 

거기 정신 없이 앉았는 섬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살았닥해도 그 많은 때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숨소리를 나누고 있는 반짝이는 봄바다와도 같은 저승 어디쯤에 호젓이 밀린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가.

 

二.

우리가 少時(소시) 적에, 우리까지를 사랑한 南平文氏(남평문씨) 夫人(부인)은, 그러나 사랑하는 아무도

없어 한낮의 꽃밭 속에 치마를 쓰고 찬란한 목숨을 풀어헤쳤더란다.

確實(확실)히 그때로부터였던가, 그 둘러썼던 비단치마를 새로 풀며 우리에게까지도 설레는 물결이라면 우리는 치마 안자락으로 코훔쳐 주던 때의 머언 향내 속으로 살달아 마음달아 젖는단 것가.

*돛단배 두엇, 해동갑하여 그 참 흰나비 같네 (박재삼, '봄바다에서', "춘향이 마음", P. 23)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虛無)의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時間)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祈禱)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갔었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 '겨울바다', "김남조시전집")

 

바다는

두근두근

열려 있다

 

이 대담한

공간

출렁거리는 머나먼

모험

떠나도 어디

보통 떠나는 것이랴

땅과 그 붙박이 길들

집과 막힌 약속들

마음의 감옥

몸의 감옥에서

이다지도 풀려나

오 발 붙이지 않고도(!)

열려 있는 無限生涯(무한생애)

불가항력의 이 팽창이여 (정현종, '바다',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P. 81)

 

다 용서해 버리자

 

기껏 백년도 못가는

갈잎 삶 가지고

 

그리고

불쌍한 나의 죄 고해하자 (김성춘, '바다 · 2', "그대 집은 늘 푸른 바다로 넉넉하다", P. 49)

 

저 혼자 왔다 간다.

 

심심해서 돌팔매질하다 스르르 돌아가는 바다 (김성춘, '겨울바다', "그대 집은 늘 푸른 바다로 넉넉하다", P.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