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도 시가 싫다. 이 하찮은 말장난보다 중요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 말장난을 아무리 완전히 경멸하면서 읽으려 해도,
결국엔 그 안에 뭔가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뭔가를 잡을 수 있는 손, 크게 떠질 수 있는 눈,
때론 일어서는 머리카락,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거창한 해석을 그 위에 갖다 붙여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원래의 뜻을 너무 많이 손대고 변형시켜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다면,
이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겠지만 -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매달려 먹이를 찾는 박쥐, 밀어붙이는 코끼리,
몸을 뒤집는 야생마, 나무 아래 지칠 줄 모르는 늑대,
몸에 붙은 벼룩에 언짢아하는 말처럼 살을 꼬집는 냉엄한 비평가,
야구팬, 통계학자 - 원한다면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
"업무 서류와 교과서" 도 제외해서는 안 된다 -
이 모든 현상들이 다 중요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구별되어야 한다.
어중이 시인들이 억지로 띄워 올린 글들은
시가 아니다.
우리들 가운데 진정한 시인이 "상상력의 정확한 해석자"가 되어
오만과 하찮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앞에 진짜 두꺼비가 살고 있는
상상의 정원을 보여줄 때에만
우리는 진짜 시를 가질 수 있다.
한편,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
시의 원 재료를 진실 그 자체인
생생한 그대로 요구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당신은 시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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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발표된 이 시는 독자의 사랑과 비평가의 극찬을 받았으며, 무어의 시에 대한 생각을 보여 준다.
기교나 어설픈 관념 등은 시의 본질이 아니며, 현상을 정확히 집어내는 언어, 마음으로 공감할 수 있는 표현들은 어떠한 형식이든 진정한 시에 가깝다는 것이다.
시적 형식 면에서는 완전하더라도 그러한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는 시는 엉성한 시며, 아예 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무어의 대표작으로 비평가의 호평을 받던 이 시는 그녀가 50년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을 하였다.
가장 악명 높은 수정은 1967년 시집에 이 시를 게재할 때 첫째 연 중의 단 3행만 남기고 나머지를 삭제해 버린 것이다.
- 수정한 시는 아래와 같다.
나도 시가 싫다.
하지만 이 말장난을 아무리 완전히 경멸하면서 읽으려 해도,
결국엔 그 안에 뭔가 진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I too, dislike it.
Reading it, however, with a perfect contempt for it, one discovers in
it after all, a place for the genuine.
그간 이 시에 대한 비평과 연구를 해 오던 비평가들과 시 전문가들을 경악시켰고, 무어는 "생략은 실수가 아니다"라는 주까지 달았다.
삭제하기 전의 원 시는 메리엔 무어를 대표하는 매우 뛰어난 시로 평가되어 왔었다.
이 시는 그 안에 많은 인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연에서,
"나도 시가 싫다" (I too, dislike it)는 영국의 소설가 새뮤얼 버틀러(Samuel Butler)가 한 청소년이 자기는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한 말이다.
셋째, 넷째 연에서,
"업무 서류와 교과서" (business documents and school-books)는 톨스토이가 일기장에 쓴 "시가 아닌 유일한 것은 업무 서류와 교과서이다"를 원용한 것이다.
무어는 이 시에서 톨스토이와 달리 긍정적으로 쓰고 있다.
넷째 연에서,
"상상의 글자 그대로 해석자" (literalists of the imagination)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윌리엄 블레이크에 대해 비평한 것인데, 무어는 긍정적으로 인용하였다.
다섯째 연에서,
"두꺼비가 살고 있는 상상의 정원" (imaginary gardens with real toads in them)은 이 시를 유명하게 했다.
하지만 어디서 인용했는지 출처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현재에는 인용 부호를 삭제하고 있다.
"시의 원 재료" (raw material of poetry)는 1913년 '스펙테이터' (Spectator)지 기사에서 인용되었다.
박쥐, 미는 코끼리, 몸을 굴리는 야생마, 나무 아래 늑대, 파리 쫓는 말 등은 이솝 우화나 다른 일화에서 발췌한 것이다.
- 차일피일님의 블로그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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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앤 무어(Marianne Moore, 1887년 11월 15일 ~ 1972년 2월 5일)는 미국의 모더니스트 시인, 비평가, 번역가, 편집자이다.
그녀의 시는 형식적 혁신, 정확한 어법, 아이러니, 재치로 유명하다.
무어는 미주리 주 커크우드의 장로교회에서 태어났는데,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존 리들 워너가 목사로 섬기고 있었다.
기계 공학자이자 발명가인 그녀의 아버지 존 밀턴 무어(John Milton Moore)는 정신병적 발작을 앓았고, 그 결과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헤어졌다.
무어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녀와 그녀의 오빠 존 워너 무어는 어머니 메리 워너 무어에 의해 양육되었다.
가족은 평생 동안 서로에게 방대한 양의 편지를 썼고, 종종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The Wind in the Willows : 1908년에 처음 출판된 영국 소설가 케네스 그레이엄의 아동 소설)'의 등장인물을 기반으로 한 장난스러운 별명과 사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를 불렀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무어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헌신적인 장로교인으로 남았으며, 기독교 신앙을 시련과 유혹을 통해 입증된 힘의 교훈으로 접근했다.
그녀의 시는 종종 힘과 역경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녀는 "종교적 믿음 없이는 살 수 없다"라고 생각했다.
무어는 6살이 될 때까지 세인트루이스 지역에서 살았다.
1894년 할아버지가 사망한 후, 세 사람은 2년 동안 피츠버그 근처의 친척 집에 머물렀고, 그 후 펜실베이니아 주 칼라일로 이사하여 어머니가 사립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자리를 찾았다.
무어는 1905년 Bryn Mawr College에 입학했다.
그녀는 역사학, 경제학, 정치학을 전공하고 4년 후 A.B.로 졸업했습니다.
시인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은 신입생 시절 동급생 중 한 명이었다.
Bryn Mawr에서 Moore는 캠퍼스 문학 잡지인 Tipyn O'Bob에 단편 소설과 시를 쓰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졸업 후에는 멜빌 듀이의 레이크플래시드 클럽(레크리에이션 클럽 : 리조트)에서 잠시 일한 후,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칼라일 인디언 산업 학교에서 경영학 과목을 가르쳤다.
펜실베이니아 학교에서 속기(速記)를 가르치기도 하고, 뉴욕 공립도서관에 근무하기도 했다.
그 후 <다이얼>지(誌)의 편집자도 지냈다.
시집 <관찰>(1924)로 다이얼상을 받고, T. S. 엘리엇의 서문이 든 <선시집(選詩集)>(1935), <세월이란 무엇이냐>(1941), <그럼에도 불구하고>(1944) 등을 내었다.
<전시집(全詩集)>(1951)은 볼링겐상과 퓰리처상을 받았다.
지적인 관찰, 정확한 이미지, 특이한 시형(詩形) 등으로서 그녀는 가장 독창적인 미국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라퐁텐의 <우화>를 영역하기도 하고, 평론집 외에 근래의 시집에는 <성채(城砦)처럼>(1957), <용이 되고파>(1960)가 있다.
81세의 나이에 무어는 1968년 국가 문학 훈장을 받았다.
이 상을 주관하는 위원회는 "우리 시대 몇 안 되는 진정한 시 발명가 중 한 명인 시의 영부인 마리안느 무어는 우리에게 절묘한 완벽함을 암시한다"라고 밝혔다.
무어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무어는 말년에 여러 차례 뇌졸중을 앓았다.
그녀는 1972년에 사망했고, 그녀의 유골은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 있는 에버그린 묘지에 있는, 가족의 묘지에 어머니의 유골과 함께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