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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응결(凝結)

높은바위 2025. 5. 4. 06:46

 

흐르는 곡은,

 

이필원 -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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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응결(凝結)

 

                                      高巖

 

폐허의 색으로 물든 창 밖,

풍경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닌 잔상(殘像),

지나간 것들이 아닌

지나가지 못한 것들의 유령.

 

나는 하루를 우려낸 찻잎처럼 퍼져 있었고,

어린 날의 웃음은

목 없는 인형의 입술에 봉인되었다.

동심(童心)은 단 하나의 모래알로 구성된 사막,

그 위에선 바람조차 제 이름을 잃는다.

 

양심(良心)이라 불리던 것은

이중 나선(螺線)의 언어로 감긴 회색 베틀,

실패한 짜임새 속에서

무늬 없는 진실이 비명을 삼킨다.

 

추억(追憶)은 벽지 속 틈새에 들러붙은 먼지,

말라붙은 수맥(水脈)을 타고

가끔 흐느끼는 소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나였는지

혹은 단지, 구겨진 날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름을 반납한 채

거울 대신 검은 유리컵에 나를 비추었고,

그 속엔 녹슨 종소리와

시들지 않는 사과(沙果)가 억지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풍경은

불붙은 눈사람의 뼛조각,

증발한 건 단지 물이 아니라

우리가 한때 존재했다는 증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