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곡은,
이필원 - 추억
* * * * * * * * * * * * * * *
기억의 응결(凝結)
高巖
폐허의 색으로 물든 창 밖,
풍경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닌 잔상(殘像),
지나간 것들이 아닌
지나가지 못한 것들의 유령.
나는 하루를 우려낸 찻잎처럼 퍼져 있었고,
어린 날의 웃음은
목 없는 인형의 입술에 봉인되었다.
동심(童心)은 단 하나의 모래알로 구성된 사막,
그 위에선 바람조차 제 이름을 잃는다.
양심(良心)이라 불리던 것은
이중 나선(螺線)의 언어로 감긴 회색 베틀,
실패한 짜임새 속에서
무늬 없는 진실이 비명을 삼킨다.
추억(追憶)은 벽지 속 틈새에 들러붙은 먼지,
말라붙은 수맥(水脈)을 타고
가끔 흐느끼는 소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것이 나였는지
혹은 단지, 구겨진 날짜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이름을 반납한 채
거울 대신 검은 유리컵에 나를 비추었고,
그 속엔 녹슨 종소리와
시들지 않는 사과(沙果)가 억지웃음을 흘렸다.
지금 이 풍경은
불붙은 눈사람의 뼛조각,
증발한 건 단지 물이 아니라
우리가 한때 존재했다는 증거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