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중종 5년(1510) 4월 22일에 기록된 우리의 역사다.
조선 중기 성종 때부터 중종 때까지 활약한 인물로, 삼포왜란에서 크게 활약했던 '소기파(蘇起坡)'라는 무신인데,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한성부 판윤을 지낸 소효식(蘇效軾)의 차남이다.
그는 전투 후 아직 살아있는 왜적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서 그 쓸개를 안주로 삼았고, 얼굴과 손에 피를 바르기를 자약하게 하니, 사람들이 ‘소야차(蘇夜叉)’라 하였다.
불교에서는 악귀를 잡아먹는 무서운 귀신을 야차라고 하니, 왜군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사람들마저 소기파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무예가 엄청 뛰어나서 삼포왜란의 1등 공신으로 뽑혔는데, 관료들이 보기에도 이 소기파가 껄끄러웠는지 1등 공신에서 빼자고 건의할 정도였다.
왜란 당시 공격을 받던 웅천(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진압에 참여했고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1494년(성종 25년)에 북방 변경정벌에 종군하였고, 1500년(연산군 6년)에 강계(江界) 이평(梨坪)에 침입한 여진족을 붙잡아 베는 등 한동안 북방 변경의 여진정벌작전에 종사하였으며, 이 전공으로 1508년(중종 2년) 경에 부령부사(富寧府使)에 올랐다.
굉장히 포악하고 무고한 백성들의 피를 즐길 것 같은 인물이지만, 막상 내 주민들한테 따뜻한 남자였던지 행정 부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고, 임지에서 떠난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지자, 해당 고을 백성들이 우리 사또나리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난리까지 쳤다고 한다.
군관으로 시작해서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병마절도사까지 역임하고 70까지 살았다.
현대의 관점에서 소기파가 저런 행적을 보인 것은 쓸개가 복수를 상징한다는 것을 떠나서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심적 외상 후의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죽은 동료나 백성들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고 해도 저걸 맨 정신으로 씹을 수는 없으니...
과거 함경도 근무 시절부터 잦은 실전을 치렀던 장군인데 거기에 더해 남방까지 내려와 허구한 날 왜구를 썰고 백성의 시체가 널린 불타는 민가를 수도 없이 목격했을 테니 당연히 정신이 많이 피폐해졌을 것이다.
동양 사회에서 쓸개를 먹는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좋은 약재, 또 하나는 월왕 구천이 복수를 위해 곰의 쓸개를 먹고 증오심을 키웠다는 와신상담이라는 말처럼 피의 복수다.
당연하지만 식인은 어딜 가나 혐오대상이다.
쓸개가 아무리 복수의 상징이라도 사람의 쓸개를 직접 꺼내 씹어대는 걸 목격하면 충격이 클 수밖에...
옛날에는 너무나도 미운 대상을 두고, 살점과 간담을 씹고 싶다는 표현을 썼다.
장군들은 물론이거니와 선비들도 적군이나 혹은 정적들을 이야기할 때 쓰는, 일종의 관용어구였다.
그런데 이게 속담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실행하는 사람이 꽤 있었던 것 같다.
소기파(蘇起坡)와 동시대인 성종 시대 회령진의 장수 신수무(辛秀武), 정산로(鄭山老) 등은 항복한 여진족 이거을가개(李巨乙加介)와 그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자리에서 배를 갈라 간, 쓸개를 꺼낸 일이 벌어졌다.
이거을가개와 매번 대치하고 있었던 변경의 장수들로서는 많은 원한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람의 배를 갈라 간을 꺼낸 엽기적인 행태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철천지 원수를 두고 간을 내어먹고 뼈를 갈아 마시고 싶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마도 앞에서 든 예들은 그런 행동들이 그저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정말 실행해 버린 경우일 것이다.
변경에서 하루하루 여진족과 싸워왔던 장수들은 전우와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수도 없이 목도했을 것이고, 그 사무치는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불태웠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일부러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여 소문을 내고, 이로써 적군에게 겁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동료의식은 사람을 강하게 하고, 잔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전쟁터에서 벗어나 있던 도성의 관리들이 보기에, 이들의 식인 행위는 커다란 문화충격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