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ㅂ

바람(風)(1)

높은바위 2025. 2. 13. 06:57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 바람은 가변성과 역동적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성을 일깨워주는 촉매가 되는가 하면 자유와 방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 바람은 수난과 역경, 시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바람은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 마음이 이끌려 들뜬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甲午年(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 하는 外(외)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었다 한다.

스믈세햇 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우에 언친 詩(시)의 이슬에는

멧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트린

병든 숫개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자화상', "미당서정주시전집", p. 35)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女人(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山脈(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 감을 줄 모르다 (이용악, '北북쪽', "이용악시전집", p. 11)

 

 

갈대와 바람

관념이여,

너로 말미암아 나 있음을 비로소 깨닫노니 가령가령 이렇게 꼼짝없이 정지하여 있는 이 때에도. (유치환, '단장· 22', "제9시집", p. 129)

 

 

숲에서 일어나는 저 바람

젊은 날의 창가의

순금빛 내일을 들추이고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이제는 어쩌지 못할 어제의 뉘우침을 두들기고

내 그림자 휘영휘영

물 속에 비낀 나뭇가지

벗은 나무그림자 헤치며 걸어가고

문득 바라뵈는

한 송이 저 구름

강물 속 절벽 위를 유유히

따라오고

다시 또 바람

숲에서 강으로

물무늬 바람 일며 지금은 낙일

전신을 번뜩이며 붉게 잠기네 (박두진, '바람', "박두진전집· 7", 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