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가스파르 중 <교수대>
아! 내가 들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밤바람의 음산한 울림이었던가?
아니면 교수대에 매달린 죽은 이의 한숨인가?
아니면 그것은 나무가 불쌍히 여겨 보호해 주는 귀뚜라미의 울음이었던가?
그것은 죽음의 소리에 멀어버린 귓가에서 파리가 먹이를 찾는 신호인가?
아니면 벗겨진 머리의 피투성이 머리칼을 잡아 뜯는 풍뎅이인가?
아니면 아마도 죄어진 그 목을 장식하려고 기다란 머슬린을 짜는 몇 마리의 거미인가?
그것은 지평선 너머 마을의 벽에서 울리는 종소리, 그리고 붉은 석양을 새빨갛게 물들이는 목 매달린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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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이 자크 나폴레옹 베르트랑 ; 알로이우스 베르트랑(Louis Jacques Napoléon Bertrand, 1807년 4월 20일 ~ 1841년 4월 29일 향년 34세)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 극작가 및 언론인이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Aloysius Bertrand)은 1807년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세바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치하의 군인이었던 아버지 조르주 베르트랑은 임기를 마친 뒤 친척들이 사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디종에 정착했고, 여덟 살의 루이는 디종을 새로운 고향으로 맞이한다.
특히 중세의 역사를 되살리려는 낭만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던 당시에 중세 부르고뉴 공국의 흔적을 간직한 고도 디종은 시인을 꿈꾸던 소년에게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베르트랑은 지독한 궁핍 속에서도 계속 시를 썼고, 1829년 직접 파리에 가서 샤를 노디에, 빅토르 위고, 생트뵈브 등 유명 문인들을 만난다.
유구한 역사의 도시 디종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의 회화적이고 중세적인 시는 낭만주의 문학을 추구하던 작가들의 모임 ‘세나클’에서 큰 호평을 받는다.
문단의 반응에 고무된 베르트랑은 곧 그동안 집필해 온 시들을 모아서 책을 펴낼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출간을 준비하던 출판업자가 도중에 파산하면서 첫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몇 년 뒤 두 번째 출간 시도 역시 출판업자의 변심으로 결실을 맺지 못한다.
베르트랑은 생계를 위해 파리와 디종을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해야 했고, 그간 잠들어 있던 그의 원고는 이윽고 조각가 다비드 당제의 후원을 받아 앙제의 출판업자 빅토르 파비의 손을 거쳐, 1842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병약하고 가난한 시인은 1841년 끝내 자신의 책을 보지 못한 채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파리의 한 병실에서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
이 낯선 필명(본명은 루이 베르트랑이고, ‘알로이시우스’는 ‘루이’의 중세식 표기다.)의 시인은 단 한 권의 작품 『밤의 가스파르』만을 남긴 채 독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세상에서 완전히 잊힌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이라는 이름을 망각으로부터 다시 끌어낸 인물은 바로 그에게서 “시적 산문의 기적”을 발견한 보들레르다.
그리고 또 한 세대가 흐른 뒤 『밤의 가스파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은,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글을 영감 삼아 피아노곡 「밤의 가스파르」를 작곡한 모리스 라벨이다.
하지만 여전히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는, 그리고 그 시 속에 깃든 “혼의 서정적 약동”과 “몽상의 파동”과 “의식의 소스라침”은 독자와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