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ㄴ

높은바위 2023. 3. 25. 07:43

 

자기 자신.

흔히 '나'는 자아 발견에 따르는 자기부정이나 자기혐오에 대한 시적 대상이 된다.

시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할 때 인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는 존재의 자기규정이 어려운 만큼 주로 구름, 바람, 새, 나무, 이슬, 바위, 거울 등의 형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 자화상.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한용운, '나룻배와 행인', "님의 침묵", p. 28)

 

광막한 우주 안에

좁쌀알보다, 작게 떠 있는

지구보다도

 

억조 광년의 별빛을 넘은

허막(虛漠)의 바다에

충만해 있는 에테르보다도

그 충만이 주는 구유(具有)보다도

그 반대의 허무(虛無)보다도

미지(未知)의 죽음보다도

 

보다 더 큰

우주 안의 소리 없는 절규!

영원을 안으로 품은 방대(尨大)!

나. (구상, '나', "구상시전집", p. 21)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억겁을 두고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벌이올시다 벌이올시다 (한하운, '나', "보리피리")

 

바람이 집이 없듯이

구름이 거처가 없듯이

나는 바람에 밀려가는 구름이옵니다

 

나뭇가지에 간혹 의지한다 해도

바람이 불면

작별을 해야 하는 덧없는 구름이올시다 (조병화, '나의 존재', "사랑하면 할수록", p. 173)

 

내 몸이 자꾸 무거워지는 이유는

공포(恐怖) 때문이다.

 

나는 내 그림자로부터 도망친다.

떨리는 손으로 그림자를 떼어 버린다.

다른 그림자 때문이다.

 

그림자를 잃고 공중에 뜬 실체(實體)는 말한다

나 내가 아니오

나 내가 아니오. (정현종, '나', "나는 별아저씨", p.43)

 

나는 짐승처럼

-그렇지

여기저기 뒹굴며 쫓기며

-그렇고 말고

휴지처럼 구겨지고 쓰레기처럼 처박히며

-아무렴

내 마음 거덜 냈을 뿐이라네. (서원동, '나는', "꿈속에서 꾸는 꿈", p. 20)

 

흙으로 만든 그릇이 바람으로 흩어지면

그 속에 있던 새가 날아간다.

없는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나'가 있다.

바람은 흙 속에서 시작되고······. (서정윤, '새·1', "나를 찾아 떠난 길", p.64)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는

나, 들여다볼수록

애매해지는

나, 너무

가까워서 너무 멀어져 버린 나

에 대하여, 결단코

나를 포기하지 않는

나,에 대하여 (한명희, '나에 대하여', "시집읽기", p.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