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73. 자 화 상

높은바위 2005. 7. 11. 05:59
 

73. 자  화  상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햇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시건설  7호. 1939. 10.

 

  * 이 시는 시집『화사집』의 서시로 실려있는 작품이다. 곧 이는 ‘화사’와 더불어 시인의 젊은 날에 있어서의 고통스러운 운명의 표정이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작품으로 이야기된다. 시인은 비록, 이 시 속의 자화상은 당시대의 일반적인 한 사람의 모습에 불과하다고 했으나, 가난과 시련, 한의 운명으로 점철되어 온 가족사 속에서 자학하고 방황하는 자신의 젊은 날의 모습을 잘 묘파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에는 온갖 수난과 역경 속에서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 온 이 나라 민중들의 고달픈 삶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곧 이 시는 가난과 수난으로 점철되어 온 이 땅의 역사적 삶 속에서 자학과 관능으로 몸부림치는 젊은 날의 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놓고 잇다.

  시인이 스스로 “애비는 종이었다.”고 고백한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진실이든 허구적 진실이든 간에 놀라운 솔직성을 지닌다. 이러한 솔직성은 어느 정도의 도전적인 자기 주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떳덧하고 도전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스스로를 “병든 수캐마냥”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은, 봉건적이고 부정적인 사회 현실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처럼 헐떡거리며 살 것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결시키려는 저항 의지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의지는 현실적인 고통을 몇 방울의 피가 섞여있을 정도로, 인간적인 진실을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끈질기게 투쟁하여 얻고, 또 피나게 지켜내려는 의지이다. 이런 이유로 그 속에서 현실적인 고통은 오히려 시의 이슬로까지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토속적인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그 가운데서 시인 자신의 실존적인 몸부림을 탐색하려 한 수준 높은 시라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