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65. 전라도 가시내

높은바위 2005. 7. 7. 13:14

 

65.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李庸岳)

 

  알록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히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두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1940.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