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64. 오랑캐꽃

높은바위 2005. 7. 7. 13:13

 

64. 오랑캐꽃

 

                                         이용악(李庸岳)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홈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ㅡ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1940. 인문평론

 

* 이 작품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연약하고 순수한 한민족의 억울함과 비통함을 형상화한 시이다. 이 시는 재래의 서정적인 표출 방식과 서사적인 표출 방식이 혼용되어 새로운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제1연에서는 과거 오랑캐가 고려 군사에 쫓겨났던 상황을,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여 연약한 변방 민족이 지닌 비애를 객관적으로 진술한 다음, 제3연에서 주관적 독백을 통해 오랑캐꽃의 명명에 대한 객관적 서술 위에, 그러한 꽃의 명명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관점을 개입시켜, ‘오랑캐’에서 ‘오랑캐꽃’으로의 시적 변용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적 변용 과정을 통해 환기되는 ‘오랑캐꽃’의 억울한 슬픔은 일제 치하의 민족의 슬픔과 일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