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23. 그날이 오면

높은바위 2005. 6. 2. 06:13
 

23. 그날이 오면

                    심 훈(1901-1934)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1930. 시집 ꡔ그날이 오면ꡕ



  * 일제 치하에서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리는 절실한 심정을 극단적 언어로 표현한 시로, 치열한 저항성을 보이는 저항시의 대표적 작품이다.

  시는 공동체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조망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이상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를 예언적 기능이라고 한다. 이 시는 이와 같은 예언적 기능을 수행한 대표적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30년 3월 1일에 씌어졌는데, 그것은 3․1운동이라는 역사의 현장을 현재에 재현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미래에까지 연결시키려는 시인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일제 치하의 암담한 상황에서 예언적 기능을 수행한 또 하나의 작품으로 이육사의 「광야」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강인한 민족 정신이 지사적 기품으로 승화되어 있는 데 비해, 「그날이 오면」은 격렬한 감정이 여과되지 않은 상태로 토로되어 강렬한 인상과 행동적인 저항 의식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