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08. 산

높은바위 2005. 7. 19. 23:25
 

108.

 

                   김 광 섭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뎄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놓고 먼 산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줌 돌 한개 들설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좋게 엎데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이 되고 명산이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1968. 창작과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