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106. 쉽게 씌어진 詩

높은바위 2005. 7. 19. 23:22
 

106. 쉽게 씌어진 詩    

 

                                         윤 동 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어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1948. 유고시집 

 

  * 이 시는 일제 강점하의 암울한 삶 속에서 시인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순결하게 노래한 작품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는 구절에서 낯설고 암울한 당대 현실의 구속과 부자유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시인이 ‘시인이란 슬픈 천명’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이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인데 대한 괴로움에 연유된 슬픔으로 보아야 한다.

  제7연까지의 내용 속에는 이같은 자신을 응시하는 ‘부끄러움’이 나타나는데, 이 감정은 시대 현실의 부름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에게 준엄하게 묻는 도덕적 염결성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