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그외 나라

쿠바:호세 훌리안 마르티 페레스(José Julián Martí Pérez)

높은바위 2023. 3. 4. 05:56

 

너의 머리를 생각 했어

 

너의 머리를 생각 했어
그림자 세계가 부러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내 삶의 포인트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것이라고 꿈꾸고 싶었습니다.

눈으로 지구를 걷는다
제기-오, 나의 열망!-그런 높이까지
거만한 분노 나 비참한 얼굴이
인간 피조물이 불을 붙였습니다.

라이브 :-죽는 법을 아십시오. 그것이 나를 괴롭히는 방법입니다
이 불행한 수색, 이 치열한 선,
내 영혼의 모든 존재가 반영됩니다.
믿음 없이 찾아서 믿음으로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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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훌리안 마르티 페레스(José Julián Martí Pérez, 1853년 1월 28일 쿠바 아바나 ~ 1895년 5월 19일 도스리오)는  쿠바의 시인이며,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 지성이다.

1853년 스페인 출신 어머니와 카나리아제도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풍족하지 못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16세 때부터 이미 '자유조국'과 같이 주로 쿠바 독립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시들을 발표했다.

17세 때 스페인 군대에 입대한 학생을 비난한 편지가 공개되면서 그는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일제하 윤동주 시인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마르티는 6개월의 수형생활 끝에 스페인 유배길에 오른다.

스페인에서 쿠바 이민자들의 가정교사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하면서 마드리드와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학과 문학, 철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멕시코로 이주한 마르티는 '오레스테스'라는 필명으로 여러 신문사에 사설과 시를 기고하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쿠바에서 스페인 식민정부가 정치적 추방자들에게 사면령을 내리자 마르티는 1878년 아바나로 돌아와 변호사와 사립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각종 모임에서 쿠바의 암울한 정치현실에 비판을 가하면서 스페인 식민지 정부에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80년 마르티는 결국 미국 뉴욕에 도착하게 된다.

1892년 마르티는 쿠바혁명당을 조직하여 대표(delegate : 그는 당수라는 표현을 거부했음)로 선출되었으며 뉴욕 시를 당의 본부로 삼아 쿠바 침공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895년 1월 31일 그는 쿠바의 혁명 지도자 막시모 고메스 등을 비롯한 동료들과 함께 뉴욕을 떠나 산토도밍고로 갔다.

이들은 쿠바에 도착해 4월 11일 쿠바 침공을 시작했다.

1개월 뒤 마르티는 오리엔테 지방의 도스리오스 평야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가 일생 동안 고대하던 쿠바 독립은 그가 죽은 지 7년 뒤에 이루어졌다.

 

그의 작품은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으로서 매우 높은 교육적 가치를 지녔다.

사상가·정치가인 마르티는 문예창작과 사회운동 분야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는 라틴아메리카 문화에 변함없는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이것은 문학과 예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이다.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과 국민의 자결권을 옹호하는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중요한 의의가 있다.

호세 마르티는 세계 권력 중심의 주변 지역에 있는 다양한 지역과 민족의 구조적인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훗날 '제3세계(Third World)'라고 정의된 라틴아메리카와 관련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현대 담론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했으며, 세계적인 차원에서 권력의 중심에서 격리된 라틴아메리카의 특수성을 보여주었다.

반면 독립에 대한 이상,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옹호, 인본주의적 우주관, 봉사에 대한 윤리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한 사회적·인종적·지리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이들에게 항거하는 강하고 일관된 이념의 기반이 되고 있다.

 

당시 국제 관계의 목격자이자 영향력 있는 활동가였던 마르티가 저술한 문헌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문헌은 범 아메리카주의(Pan Americanism) ― 미국에 있는 권력 집단의 도구 ― 의 창안자들이 미국을 세계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외교·정치·경제적으로 어떤 활동을 전개했는지에 관해 보여주었다.

 

작가로서 호세 마르티는 세계적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폭넓은 문화 소양과 엄청난 창조적 재능을 지닌 그는 강렬하고 짧은 생애 동안 에스파냐 어 현대문학의 가장 강력한 기초를 이룬 산문과 시를 창작했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등이 자신의 모국어로 그랬던 것처럼 그는 에스파냐 어 권에서 현대문학을 창조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루벤 다리오(Rubén Darío)와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Domingo Faustino Sarmiento)는 글을 통해 공개적으로 마르티가 작가로서 얼마나 훌륭한지 인정했다.

그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와 견주어졌다.

그는 에스파냐 어를 새롭게 변모시켜 독창적으로 그의 산문과 시에 적용했는데, 고답파(Parnassians)와 상징파(symbolists)의 기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의 언어, 구문, 형용사 등을 매우 특이하게 사용했으며, 공감각적 비유, 시적 나열, 이원적 구조, 자유시, 운율의 파괴 등과 같은 현대시의 자원을 활용했다.

 

"스페니시아메리카(Spanish America)가 생길 때('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뜻함)까지 스페니시아메리카 문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라틴아메리카 주요 신문들에 대서특필됨으로써 그는 아메리카대륙 전체에 반향을 일으킨 최초의 쿠바인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언어를 새롭게 재창조할 아니라 현실적이고 세계적인 문화, 특히 아메리카의 문화를 끌어내어 작품으로 승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물을 통해 19세기의 마지막에 있었던 사회의 불안정성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볼 수 있다.

그는 현대성의 거의 모든 주제를 다루었으며, 명상적 산문에는 명상으로 가득 찬 시와 함께 서술되어 있어 산문 장르를 극도로 긴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세계 문학의 거장으로 여겨지며 그의 글은 문학적 가치와 테제 때문에 세계의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테제는 빈민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인본주의를 옹호하고 아메리카의 정신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티는 제3세계의 작가라는 사실 때문에 제대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호세 마르티라는 역사적 인물의 중요성은 그가 사망한 지 100주년이 되는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호세 마르티' 국제상이 제정되고 그해의 인물 가운데 하나로 발표됨으로써 유네스코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또한 2001년 제31차 유네스코 총회에서는 2002년~2003년 2년 동안 그의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를 제휴하는 결정을 승인했다.

 

마르티의 심오한 인본주의 사상에는 진정한 해방을 위한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그는 19세기 라틴아메리카 사상과 운동의 주요 인물이며, 그의 생애와 작품은 아메리카 대륙, 특히 그가 '우리 아메리카(Our America)'라고 지칭했던 나라들의 사상적 자산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토착 문화를 지키고, 격변 상황의 국가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대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격의 근원적인 해결책 탐구하고, 사상가와 정치가로서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오늘날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정체성과 통합이라는 이론적 주춧돌을 놓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개혁 운동에 대해 이념적으로 언급할 때 반드시 필요한 인물로도 언급된다.

마르티의 작품은 라틴아메리카의 진정한 정체성의 생성과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그의 유산은 아메리카 반구와 역사 및 현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원천 지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