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ㅎ

하관(下棺)

높은바위 2023. 5. 26. 16:29

관을 무덤 속의 광중으로 내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상징하는 말.

관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 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박목월, '하관', "난 기타", <박목월시전집>)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하관

線上(선상)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下棺하관', "강아지풀" p. 55)

이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모를 풀꽃들의 뿌리로 돌아가고

향불 사르는 연기도 멀리 멀리

못 떠나고

관을 덮은 명정의 흰 글자 사이로

숨는다

무심한 산새들도 수직으로 날아올라

무너미재는 물소리가 요란한데

어머니 어머니

하관의 밧줄이 흙에 닿는 순간에도

어머니의 모음을 부르는 나는

놋요강이다 밤중에 어머니가 대어주던

지린내 나는 요강이다 툇마루 끝에 묻힌

오줌통이다 오줌통에 비치던

잿빛 처마 끝이다

이엉에서 떨어지면 눈도 못 뜬

벌레다

밭두럭에서 물똥을 누면

어머니가 뒤 닦아주던 콩잎이다 눈물이다

저승은 한줌 재로 변하여

이름 모를 뿌리들의 풀꽃으로 돌아오고 (오탁번, '下棺하관',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p.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