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ㅋ

높은바위 2023. 5. 26. 16:24

물건을 베거나 썰고 깎는데 쓰이는 연장의 한 가지.

흔히 칼은 그 양면성으로 인해 무력이나 폭력을 비유하는 한편 잘못된 것을 척결하는 정의와 단죄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칼이 사람을 살리는 칼, 즉 활인검과 죽이는 칼, 즉 살인검으로 쓰이는 경우가 그러한 양면성, 모순성의 예가 된다.

또한 칼은 정신적인 면에서 한이나 증오심, 적개심 또는 의지나 결의를 상징하기도 한다.

苦熱(고열)과 自身(자신)의 탐욕에

여지없이 건조 풍화한 넉마의 거리

모두가 虛飢(허기)걸린 게사니 같이 붐벼 나는 속을

-칼 가시오!

-칼 가시오!

한 사나이 있어 칼을 갈라 외치며 간다

그렇다

너희 정년 칼들을 갈라

시퍼렇게 칼을 갈아 들고들 나서라

그러나 여기

善(선)이 詐欺(사기)하는 거리에선

윤리가 폭행하는 거리에선

칼은 깍두기를 써는 것밖에는 몰라

칼은 발톱을 깎는 것밖에는 감쪽같이 몰라

環刀(환도)도 匕首(비수)도

食(식)칼 처럼 값없이 버려져 녹슬거니

그 환도를 찾아 갈라

비수를 찾아 갈라

식칼마저 모조리 시퍼렇게 내다 갈라

그리하여 너희를 마침내 이같이

기갈 들여 미치게 한 자를 찾아

남의 손에 그 시퍼런 날들을 들고 게사니 같이 덤벼

남 나의 어느 모가지든 닥치는대로 컥컥 찔러

황홀히 뿜어나는 그 새빨간 선지피를

희광이 같이 희희대고 들이켜라는데

그리하여 그 목마른 기갈들을 추기라는데

가위눌린 虛妄(허망)들을 채우라는데_​​

그러나 여기 도둑이 도둑맞는 저자에선

대낮에도 더듬는 무리들의 저자에선

이 구원의 福音(복음)은 도무지 팔리지가 않아

-칼 가시오!

-칼 가시오!

사나이는 헛되이 외치고만 간다. (유치환, '칼을 갈라', "제9시집", p. 84)

그러나 당신이 오시면 나는 사랑의 칼을 가지고 긴 밤을 베어서 일천 토막을 내겠습니다. (한용운, '여름밤이 길어요', "님의 침묵", p. 147)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을 보았습니다', "님의 침묵", p. 65)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는 물같이 보드랍지만은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한용운, '오셔요', "님의 침묵" p. 158)

뼉따귀와 살도 없이 혼도 없이

너희가 뱉는 천 마디의 말들을

단 한 방울의 눈물로 쓰러뜨리고

앞질러 당당히 걷는 내 얼굴은

굳센 짝사랑으로 얼룩져 있고

미움으로도 얼룩져 있고

버려진 골목 어귀

허술하게 놓인 휴지의 귀퉁이에서나

맥없이 우는 세월이나 딛고서

파리똥이나 쑤시고 자르는

너희의 녹슨 여러 칼을

꺾어버리며 내 단 한 칼은

후회함이 없을 앞선 심장 안에서

말을 갈고 자르고

그것의 땀도 갈고 자르며

늘 뜬 눈으로 있다

그 날카로움으로 있다. (조태일, '식칼론 · 2, 허약한 시인의 턱 밑에다가', "국토", p. 112)

망치로 쳤다

匕首(비수)를 위하여

번득이는 칼날을 위하여

무른 쇠를 쳤다

무른 육신을 달궜다

가슴의 熱病(열병), 이마에 찬 얼음

거친 목숨을 물에

식혔다

세상은 달아오른

용광로

사랑으로 눈멀고

증오로 눈뜨는

무쇠

원수의 손으로 만들어진

망치로 쳤다

칼날을 세우기 위하여

잠든 증오를 깨우기 위하여 (오세영, '칼', "모순의 흙", p. 58)

칼이 눈에 띄면

당장 치우느라 부산하다

두렵다

칼이 눈에 띄면

칼을 잡고 누군가 쑤시던가

나를 찌를 것 같아 두렵다

치우자 치우자 부산으로 될까

마음 속 깊이 가득 찬

칼들 그대로 둔 채로 (김지하, '악마', "별밭을 우러르며", p. 54)

칼을 무서워하는 이도

때로 칼이 되고 싶어 한다

사과의 상한 데를

도려내는

네 마음의 아픈 데를

도려내는

썩은 지구의 한 구석을

도려내는

날카롭게 날이 선

칼이 되고 싶어 한다 (허영자, '칼',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p. 46)

붉은 잎 하나가 시퍼런 칼이 되어 엉성한 내 가슴을 정신없이 찌른다

나 하나 바로 세우지 못해, 아 50년이 무너진다

터진 맨 몸 위로 번지는 너의 입술

허물어진 내 영혼이 기를 쓰고 밀어낸다

한 번도 쏜 적 없는 화살이 치욕으로 떨고 있다 (유제하, '칼', "變調변조", p. 103)

새벽에

소주에 칼 한 자루 씻어

비수처럼 우는 칼날 그

칼날 입에 물고

하늘이여...... 하늘이여

급소여

다시 칼 한 자루 입에 물고

새벽 별빛 하나 바라본다

급소여

오오 저 또 또 보이는

저 급소여 (박남철, '칼', "반시대적 고찰", p. 33)

늘 그의 몫이었다 날(刃인)을

벼르는 일은

집안의 큰 일은 칼

가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 번도 아버지가 칼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손금보다도 자주 환히

들여다보던 논밭들이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던 그날도

군대에 간 큰오빠의 생사를

알 수 없던 그때도

먹을 갈듯 까마득히

칼을 갈으셨다

한 밤중에 남몰래 칼 가는 모습이

그믐달보다 더 퍼렇게 날 서 있었다

길기만 하던 칼 같은 그의 생애

눈물에 녹슬던 칼의

한평생이었다 (이화은, '아버지의 칼', "이 시대의 이별법", p.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