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대문학은 간단히 말하면 다이쇼오(大正)의 15년 동안을 합쳐서 메이지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 있어서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은 정치적 혁신 뿐 아니라 실로 일본인들의 전 생활 분야에 걸친 혁명적 근대화 시기였으며 따라서 일본문학의 근대화의 개화기에서 결실기임을 의미한다.
그 근대화의 절대적인 성격은 한마디로 해서 서구화의 과정이다.
근대화 이전의 문학이 한국의 중개를 비롯한 중국문화 수입에 영향을 입었지만, 근대화의 과정은 그들이 직접 서구문화를 수입함으로써 동양에서 맨 먼저 문학의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화를 의미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화를 의미했다.
문학계에 있어서도 1000년 이래 귀족과 무가(武家)와 승려 등 특권계급의 손에서 전체 국민의 손으로 해방되어서 대중화되었다.
이 근대화의 시기를 4기로 나누어 보면 편리하다.
초기는 서양문물의 직역시대라 할 수 있는데 <화류춘화>를 비롯한 번역이 많이 나와서 환영받았다.
다음의 제2기를 메이지 20년에서 30년의 10년간으로 본다면 이 시기에는 이미 직역시대가 지나고 자각시대에 들어서서 우수한 근대적 문학작품들이 나타났다.
즉, <일본문학전서> <일본가학전서> <제국문학(帝國文學)> 등의 방대한 출판이 나타나서 새로운 근대 문학관으로서의 고전문학의 가치를 재인식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 시기는 사실주의와 낭만주의(이상주의)의 격렬한 대결시기로서 모리와 쓰보우찌는 역사적인 논쟁으로 문단의 패권을 다투었다.
이 시기에 천재적인 여류작가 히구찌(通口一葉)가 주정적인 작품을 발표해서 문단의 주목을 끌었으나 아깝게도 요절하였다.
제3기는 메이지 30년부터 40년까지의 10년간으로 보면 그전의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문학도 차차 난숙기에 이르러 새로운 맛이 상실되기 시작하였다.
5·7조(五七調)를 바탕으로 한 신체시의 대표 시인은 시마자끼와 스찌이였고, 그 뒤에 스스끼다·감바라·우에다 등이 활약했는데 상징시의 개척도 이들의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제4기는 제3기로부터 메이지 말년까지인데 문학사조로서는 자연주의의 전성기였다.
또 이 시기에 일본에 최초로 상징주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시험되었는데 그것은 감바라의 장편 자유시가 구조를 이루는 한편 평론으로는 이와노가 자연주의와 상징주의를 융합시킨 이른바 신자연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근대문학의 후기를 다이쇼오 15년간으로 그치면 쇼오와(昭和)로 시작되는 현대문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의 문학사조의 주류로 자연주의의 뒤를 이은 신이상주의가 대두하였다.
시라까바파(白樺派)로 알려진 무샤노고오지·시가·나가요·아라시마 등은 인도주의를 신봉하는 신이상파에 속해 있었다.
이 신이상주의의 특징은 작가의 주관이 중요시 되었으므로 소위 심경문학(心境文學)이다.
이 요소는 탐미적·향락적·신비적·퇴폐적이었고, 따라서 신낭만주의로 총칭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조적인 면에서 보면 역시 자연주의 문학의 잔재인 개인주의 내지는 허무주의가 기조로 되고 있다.
따라서 아름답기만 하면 좋은 예술이라는 예술지상주의의 일면도 강하였다.
그리고 이 신이상주의가 더 비약해서 마침내 비현실적이요 공상적인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는데, 이러한 문학의 인도주의적 사상은 새로운 사회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쇼오와(昭和) 초부터 10년까지를 한 기간으로 본다면 좌익 문학과 신감각파 문학이 뚜렷이 대립된 시기가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에는 문학도 방황의 고민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았고, 학문과 사상과 예술의 발표 자유를 얻은 문학인들은 급속도로 부흥되는 경제 환경과 함께 일본문학사상 최대의 황금시대(우선 경제적으로)를 갖게 되었다.
전쟁 전부터 있던 대가와 중견들이 꾸준히 활동하는 동시에 새로운 전후 작가들이 대량 진출하였다.
전후의 일본에 대한 세계적 흥미는 일본문학을 각국어로 많이 번역한 덕택인데, 그것은 일본 사람들의 서투른 외국어로 된 번역이 아니고, 각국인들의 일본문학 번역전문가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제적인 문학회의가 일본에서 자주 열리는 것도 2차대전 후의 세계문단의 한가지 유행으로 되어 있다.
흥겨운 샤미센(일본악기)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