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어린아이인 나에게서
순진함을 털어 내버리며,
그들은 내 당근수프 위에 바퀴벌레와 함께
지혜를 뿌려 놓았다.
덧대어 기운 내 셔츠
그 봉합선 속에 꿰매어진
벼룩들이
작은 소리로
지혜를 속삭여 주었다.
그러나 가난이 지혜는 아니며
돈 또한 지혜는 아니다.
그들이 텅 빈 내 위장을 강타한 뒤로 나는
발작적으로 움직이며,
조금씩,
어쭙잖게 성인이 되어 갔다.
나는 나이프들의 과장된 은어를 사용했다.
나는 누군가가 내버린 담배꽁초에서
싸늘한 타액의 연기를 피워 마셨다.
나는 내장을 통해 전쟁의 굶주림을 터득했다.
내 늑골들이 나에게 러시아의 지형을 가르쳐 주었다.
흔히 말하는 명성을,
아무도 나에게 주질 않았다.
병아리 목 잡아채듯
나 혼자서 그렇게 움켜잡았다.
전시의 기차역처럼
비명 지르며
기어오르는,
울부짖는 사람들로 가득한
내 영혼.
70개 이상의 국가들과
모든 집단 수용소들,
모든 기념물들,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긍지와
수치,
사기 도박사들과 대통령들,
이 모두로 내 영혼은 가득하다.
시대를 삼키고 그것에 목이 메어,
허나 메스꺼운 경멸로 토해 내지는 않으며,
나는 흙먼지 혹은 오물을 다 알며,
수상쩍은 지혜를 지닌 온갖 갈까마귀들,
그 이상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거만하게 자라고,
너무 으쓱대기에 내가 착해지기는 틀린 일.
어찌할 수 없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나를
당신들은 생각하겠지, 어떤 특별한 스탬프가
내 이마 가로질러
1급 비밀
그 은밀한 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나는 코를 쳐들어 공허하게 천장을 바라보며
그들이 이내 나를 살해하리라는
유치한 생각으로 즐거워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홍콩에서 나는 칼날 위로 뛰어내리려 하였고,
베트남에서 나는 총알을 가지고 장난을 했다.
살해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영웅이 되기를 몹시 바랐지만,
나의 죽음을 연기시키며 그들은
교묘히 형벌을 가하였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굴욕적으로―
아무런 외상外傷도 없이
내면의 상처만 입은 채.
그들은 나를 들볶고 괴롭혔으며,
나를 산 채로 잡아먹으면서,
교활한 고문으로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죽음 아닌 죽음으로.
부끄럽게도 온전히 살아남은 나는,
우스꽝스러운 전쟁의 흉터나
여타의 전리품들을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않는다.
그들이 나를 죽이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게다 :
만일 나의 지식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착잡한 생각에 나의 허풍은 사그라들고
옛 자만심의 찌꺼기들이 사라져 버렸다.
나의 행위들은 나의 내적 욕구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나의 말들은 나의 내면세계를 따라가지 못한다.
당신의 삶의 신비, 그 꼬리라도 잡으려 하지만
그것은 미끄러지듯 당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우리가 더욱더 많은 신비를 알게 될수록,
가장 큰 신비는 더욱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을 해저에 묻어 버렸으며,
저주받은 지식의 심연은
저 유명한 함선들을 삼켜 버리고,
저 막강한 국가들을 먹어 치웠다.
지쳐서 절름거리는 아틀라스의 무게에 눌려
찌부러든 땅귀신처럼,
나는 재능의 부족을 괴로워하며
이 지상을 헤맨다.
아마도 이렇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만취한 그의 선원들과 피 위에 돛을 올려,
신비의 심연 속을 헤맸을 테지
안갯속에 녹아들며 조롱하는 그 신비의 심연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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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는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의 장시(長詩)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원작 : 푸꾸 FuKu) 1985>의 맨 앞부분이다.
푸꾸(FuKu)는 모든 저주의 이름들 앞에 퍼붓는 말이다.
욕이다.
이 시에서는 독재 권력을 향해 쏟아내는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옙투셴코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정치적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긴 시를 이루고 있다.
짧은 시와 산문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한 권의 시집이 한 편의 시인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대하시(大河詩)라고 말할 수 있다.
옙투셴코는 1961년 마야코프스키 광장에서 1만 명의 청중 앞에서 시를 낭송한 적이 있다고 한다.
좋은 시절이었다.
시가 대중들과 호흡하면서 정치가 되고, 칼도 되었으니.
나는 위조지폐라도 찍어낼 테다.
권력을 향한 저항으로서는 정말 매력적인 선언이 아닌가.
감상을 하며 당신은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는가, 생각에 잠기는 것도 좋을 듯......
- 브린니의 서재(brynlee.tistory.com/123)에서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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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1932년 7월 18일 ~ 2017년 4월 1일)는 소련~러시아의 시인, 문인, 영화 제작자이다.
1933년 7월 18일 이르쿠츠크주 출생.
옙투셴코는 어머니의 성으로 원래 성은 강누스(Гангнус, Gangnus)이다.
1961년에 바비야르 학살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 바비 야르(Бабий Я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3번의 가사로 사용되기도 한 그의 대표작이며, 이 작품으로 1963년의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기도 했다.
19세의 나이에 '미래의 전망'이라는 첫 시집으로 소련 작가협회에 최연소 회원으로 이름을 올리며 일찌감치 작가로서의 재능을 선보였다.
이후 1952년부터 모스크바 고리키문학대학에서 공부했으나 1957년 발표한 시 '지마역'이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퇴학당했다.
1961년에 발표된 시 '바비 야르'라는 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1년~1943년까지 많은 유태인, 러시아인 등이 나치 독일군에 학살당했던 키예프 북서부 바비 야르라는 곳에 소련이 인근 공장의 폐기물 매립장을 세우려 하는 것에 대한 비판, 나아가 바비 야르 사건에 대해서 함구령을 내려 사건을 잊히도록 하려는 소련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전에도 그는 스탈린이 죽었을 때 "우리는 스탈린이 다시는 그의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반체제적인 작가로 몰려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에는 소련 당국의 탄압을 많이 받았다.
1971년 흐루쇼프는 죽기 일주일 전 먼저 전화를 걸어 사저로 불러서 "나는 당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당신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시인이라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정치가였다. 정치가라는 것이 얼마나 역겨운 직업인지 당신은 모를 거다. 정치가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그저 소리 지르는 수밖에 없는 자리다"라며 옙투셴코에 대한 탄압을 사과했고, 옙투셴코는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렇게 흐루쇼프 시절 소련 당국을 거침없이 비판했지만, 1964년 흐루쇼프가 권력에서 밀려난 뒤부턴 옙투셴코의 저항 정신도 무뎌지고 체제 순응주의자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할 때까지 공산당 정부가 제공하는 많은 특혜를 받았고, 국외여행도 비교적 자유롭게 하며 많은 독자를 확보했다.
한창 독자가 많았을 때는 미국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비롯해 러시아 내외의 대형 운동장에서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시낭송회를 열며 팝스타와 같은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2007년부터 미국 털사 대학교와 뉴욕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2017년 4월 1일 털사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