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자,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라는
일본 청년은 국가의 영웅을 죽인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을 처단하리라 결심했다.
군인 청년은 만주로 가, 안중근의 헌병 간수가 되었고, 그를 볼 때마다 욕설을 퍼붓고 괴롭혔다.
어느 날 안중근은 적개심이 가득 찬 청년의 눈빛을 조용히 응시하며 말했다.
"개인과 민족과 세계는 그 자체로 귀하고 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오.
하지만 당신의 영웅은 울타리를 파괴하고 해체한 사람이오.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전범을 제거한 것뿐이외다."
이 말은 지바 도시치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안중근의 사람됨에 감동한 그는 그 뒤부터 꼬박꼬박
안 의사라고 부르며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쌓아 나갔다.
안중근은 그에게 '국가안위 노심초사'등 많은 글씨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정부로부터 안중근의 사형 명령이 내려왔다.
슬픔에 잠긴 그는 이 사실을 알렸다.
안중근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친구, 너무 슬퍼하지 마오. 정작 슬픈 것은 우리의 이별이 아니라 짓밟힌 채 일어나지 못하는 조국의 현실이라오."
군인으로서 안중근을 간수하는 역을 맡게 되어 괴로워하던 그는 사형집행 이전에
안중근 의사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받고,
안 의사가 사형을 당하자, 지바 도시치는 교도관을 그만두고 고향 센다이로 돌아왔다.
그는 구리하라시 다이린지(大林寺: 대림사)라는 절의 한 법당에 안 의사의 영정과 글씨를 걸어 놓고 20년 동안 모셨다.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며 흠모하여 죽을 때까지 안중근 의사의 기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구리하라시 다이린지(大林寺)의 법당 본존불 불단은 안중근과 지바 도시치를 모시고 있다.
그는 임종 순간에도 그는 아내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안 의사를 부탁하오. 그분은 내 생애 최고의 스승이었소."
아내는 남편의 말을 잊지 않고 20여 년 넘게 모시다가 숨을 거뒀다.
그 뒤 수양딸 미우라 양은 안 의사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대림사에 비석을 세웠고, 그의 글씨를 우리나라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