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가랑비가 내리니
갑자기 오후가 개인다.
내리다인지 내렸다인지
분명 비는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
빗소리를 듣는 이는
그지없는 행운이
<장미>라 부르는 꽃과 유채색 신기한 색조를
현현시켰던 그 시간을 회복하였네.
유리창을 눈멀게 하는 이 비가
상실된 아라발의 지금은 가버린 어느 정원 포도 덩굴
검붉은 알갱이에 생기를 돋우리.
젖은 오후는 내가 갈망하던 목소리
죽지 않고 회귀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돌려주네
* * * * * * * * * * * * * *
* 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 1899년 8월 2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1986년 6월 14일 스위스 제네바)는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이다.
보르헤스는 20세기 지성사에서 가장 박학다식한 작가이자 라틴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고 있다. 그의 백과전서적인 관심은 신비주의 카발라, 기호학, 형이상학, 해체주의, 신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그는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작품을 써냄으로써 리얼리즘이 지닌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루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보르헤스 책에는 문학의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그는 인류의 신화와 종교·철학에 대한 기억을 담으면서 압축된 언어와 서술의 경제를 보여줬다.
보르헤스는 '인간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고전적 질문에 새 해석을 제시했다. 보르헤스 문학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늘 아래 새로운 문학은 없다. 모든 책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호 텍스트'다. 작가와 독자는 텍스트를 매개로 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셰익스피어를 읊는 사람은 누구나 셰익스피어다. 인간은 허구의 창조자이기도 하지만 그 자신이 허구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허구다. 우리는 어둠을 견디기 위해 꿈을 꾼다. 우리는 꿈을 꾸지만 누군가의 꿈속의 인물이기도 하다. 위대한 작가는 후배 작가들의 글 속에서 희미하게 되살아나 영생을 누린다. 작가는 누구나 앞선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기에 독창적인 그 누구도 아니지만, 오히려 아무도 아니기에 죽지 않는 사람이 된다."
그의 아버지는 작가 및 변호사로 활동했는데, 어머니(보르헤스에게는 할머니)가 영국 여성이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에 따라 가정에서 스페인어보다도 영어를 더 많이 접하게 되었고, 보르헤스 자신도 영어로 생각하고 스페인어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가족들과 함께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스위스, 스페인, 마요르카 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보냈고 1919년 스페인에서 최후주의 운동을 주도하다가 1921년 고향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와 문예지 <프리즘>을 창간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 머리를 심하게 다쳐 패혈증으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는데 그 뒤 자신의 정신이 온전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고, 그 뒤부터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아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시인으로 시작해 기호학, 해체주의, 환상적 사실주의, 후기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20세기 문학사, 나아가 지성사의 키워드 대부분을 섭렵한 먼치킨. 굳이 이름 붙이자면 환상소설에 가깝지만 보르헤스 소설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환상적 사실주의. 20세기 모더니즘의 경직된 세계를 허물었다고 평가받는다. 덕분에 인문학과 철학 쪽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는 편. 철학 교재로 써먹는 대학도 있다고 한다.
환상문학 전반에 관심이 있어서, 프란츠 카프카, 에드거 앨런 포,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탈모더니즘적인 문학에 깊은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포의 팬이라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투자하여 포의 책을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그의 단편소설은 다시 쓰기, 혹은 추리 소설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보르헤스는 착상을 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 그 착상을 서술한 책이 있거나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후 그 사실과 책, 인물에 대해 평을 하는 식으로 적는다. 그 사실과 인물, 책을 추적해 가는 과정은 추리 소설의 모습을 어느 정도 닮아 있다. 그리고 서술이 핵심에 닿을 때쯤이면 어김없이 문장을 끝내 문장과 서술, 상상의 갈증을 표현한다. 이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라고 평했다.
또한 평생 동안 단편소설만을 선호했는데, 단편으로 끝낼 수 있는 내용을 굳이 장편으로 적어내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종이 낭비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는 이야기. 보르헤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어의 풍부함보단 빈곤함을 추종하라고 말해왔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짧은 단편은 머릿속에서 퇴고할 수 있으니 편했다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그래서 기본적으로 보르헤스 책들은 200 페이지 이내로 얇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