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인생의 봄에 벌써
나는 방랑의 길에 올랐다.
청춘의 아름다운 춤들일랑
아버지의 집에 남겨둔 채로
유산과 소유의 모든 것을
즐겁게 믿으며 버려 버렸다.
가벼운 순례자의 지팡이를 들고
어린이의 생각으로 길을 떠났다.
길은 열려 있다. 방랑하라
언제나 상승을 추구하라는,
거대한 희망이 나를 휘몰고,
어두운 믿음의 말이 들린 때문에.
황금빛 대문에 이를 때까지
그 문 속으로 들어가라고,
그곳에서는 현세적인 것이
거룩하고도 무상하지 않으리라.
저녁이 되고 또 아침이 와도,
나는 한 번도 멈춘 일이 없다.
그러나 내가 찾고 원하던 것은
나타난 일이 도무지 없다.
산들이 행로를 가로막았고
강들이 발걸음을 얽매었으나,
협곡 위에는 작은 길을 내고
거친 물살 위엔 다리를 놓았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흘러가는
어떤 강기슭으로 나는 왔다.
강의 길을 즐거이 믿으면서
나는 강의 품속에 몸을 맡겼다.
그 강의 유희하는 물결은
나를 큰 바다로 이끌어 갔다.
내 앞에 드넓은 허공만 있고,
목적지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어떤 길도 그곳으론 가지를 않고,
나의 머리 위의 저 하늘도
땅과는 한 번도 닿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은 결코 이곳일 수 없다.
* 쉴러의 생가는 독일 네카르강 언덕 마르바하라는 작은 마을에 있다.
1759년생으로서 괴테보다 10년 늦게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신학을 배워 성직자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마르바하는 카알 오이겐 공이 지배하는 군소 절대 전제국으로서, 뛰어난 인재를 찾아내어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려는 군국주의 정책 때문에 쉴러는 카알 학원 학생이 되었다.
학교 생활이 시작됨과 더불어 쉴러는 곧 감금 생활, 군국주의, 예속 제도, 귀족의 자세와 소시민 자세 사이의 차별 등으로 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환경이었기에 그 억압 속에서 자유시인 쉴러는 힘차게 자라나게 된다.
이윽고 희곡 <군도>가 창작되고 1782년에 만하임에서 상연되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스투룸 운트 드랑(질풍 노도)시대에 있어서 그의 최대의 작품인 것이다.
쉴러는 원래 사상가이며 극작가여서 <빌헬름 텔>을 비롯하여 수많은 뛰어난 극작품과 미학상의 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시의 분야에서는 사상시와 극적 발라드 등에 뛰어났고, 그 수사는 웅장하기조차 하다.
특히 베에토벤의 제9교향곡 합창 가사가 된 <환희의 찬가>는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