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사육신 박팽년(朴彭年) 일가의 멸족

높은바위 2025. 2. 19. 07:04

 

집현전 선비에 신숙주, 최항, 이석형, 정인지 등이 박팽년, 성삼문, 유성원, 이개, 하위지와 함께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는데, 성삼문은 문란(文瀾)이 호방하나 시에는 짧고, 하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에는 능하나 시를 알지 못하고, 서원은 천재가 숙성하였으나 본 것이 넓지 못하고, 이개는 맑고 영리하여 높이 빼어났으며 시도 또한 뛰어나게 맑았으나 제배들이 모두 박팽년을 추앙하여 집대성(集大成)이라 하였으니 그는 경학, 문학, 필법이 모두 능함을 이름이다.

그러나 참화를 입어서 저술한 것이 세상에 남지 못하였다.《慵齋叢話용재총화》

 

세조가 육신들에게 형을 줄 때에 김질(金礩)로 하여금,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부르던 노래를 읊어 그 마음을 시험했었다.

이때 성삼문은 정몽주의 노래로 대답하였고, 박팽년은 다음과 같은 시로 대꾸했다고 전한다.

 

금생여수(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금이나며,

옥출곤강(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옥이 나랴.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한

임마다 좇을소냐.

 

박팽년 일가가 멸족될 때, 둘째 아들 박순(朴珣)의 아내 성주이 씨(星州李氏)가 아이를 배고 있었다.

관헌은 이 뱃속에 든 아이까지도 아들일 경우에 사형을 처한다는 태중아까지 선고를 내렸었다.

교동(喬洞) 현감이던 이질근(李軼根)의 딸인 이 씨는 친정인 달성군 하빈면 사동(河濱面沙洞)에 내려가 살았는데, 낳은 것이 태중선고를 받은 아들이었다.

유일한 이 혈손을 보존하기 위해 박팽년의 충비(忠婢) 박 씨는 마침 그가 딸을 낳았음을 기화로 바꿔 기름으로써, 이 박팽년의 혈손은 살아날 수가 있었다.

 

이 아이가 자란 후인 성종 때 일이었다.

박순(朴珣)과 동서지간이던 이극균이 경상도 감사로 와서, 이 위장된 박비(朴婢)의 소년을 불러놓고 울면서 자수를 권고시켰다.

이 열여섯 소년은 서울에 가 자수하였고, 성종은 특사령을 내려, 그때야 본성을 찾은 이름을 지어 박일산(朴壹珊)이라 하였다.

이같이 역신(逆臣)의 불명예가 씻기게 되자, 박팽년 피화 당시 몰래 땅에 파묻어 두었던 신주(神主)와 세종이 박팽년에게 하사한 가보(家寶)인 남빛 비단옷(세종이 입었던 것)을 캐어냈다.

신주는 완전한데 옷은 썩었더라 한다.《丙子錄병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