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프랑스

보들레르

높은바위 2015. 1. 29. 07:05

 

이 시는 <악의 꽃> 재판(1861년)에 수록되어 있는데, '처녀와 같은 순진성'을 지닌 여배우 마리 브뤼노에 바쳐진 작품이다.

<악의 꽃>에는 3명의 중요한 연인이 등장한다.

혼혈 여성인 잔느 뒤발, 보들레르가 플라토닉한 사랑을 바친 사바티에 부인, 그리고 여배우 마리 브뤼노이다.

마리 브뤼노는 예명을 마리 도브랑이라고 했다.

1854년에 보들레르가 만났을 때는 무명이었으나 뒷날 환상극의 주역을 맡고부터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다.

고뇌에 빠져 죽음의 공포에 떨던 보들레르는 "나의 수호(守護)천사, 뮤즈, 마돈나가 되어주오"라고 애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는 보들레르의 친구인 시인 방빌의 품에 안기게 되어 사랑은 슬프게 끝난다.

 

 

 

                      가을의 노래

 

                                                  1

 

이윽고 우리는 가라앉을 것이다, 차디찬 어두움 속으로.

너무나도 짧은 우리의 여름날, 그 강렬한 밝음이여 안녕히!

불길한 충격을 전하며 안마당 돌 블럭 위에

던져지고 있는 모닥불 타는 소리를 나는 벌써 듣는다.1

 

이윽고 겨울 그것이 내 존재에 돌아오리니, 분노와 증오와

전율과 공포와 강제된 쓰라린 노고

그리고 북극의 지축에 걸린 태양과 같이

나의 심장은 이제 언 붉은 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

 

던져지며 떨어지는 장작더미 하나하나를 나는 떨면서 듣노니

세워진 단두대의 울음조차 이렇듯 둔탁하지 않다.

나의 정신은 성문을 파괴하는 무거운 쇠망치를 얻어 맞고

허물어지는 성탑과도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에 내 몸은 흔들리어

어디선가 관에다 서둘러 못질하고 있는 듯하다.

누구를 위하여? ─ 어제는 여름이었으나 이제는 가을!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는 어디엔가 문밖에 나서기를 예고하고 있는 듯하다.

 

                                                  2

 

나는 사랑한다, 네 길다란 눈, 그 초록빛 띈 빛을.

상냥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여, 이제 내게는 모든 것이 흥미 없다.

그 어떤 것도 그대의 사랑도 침실도 또 난로도

해변에 빛나는 태양보다 낫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상냥스러운 사람이여! 역시 나를 사랑해 주오.2

비록 내가 은혜를 모르는 자요, 심술장이라도 내 어머니가 되어다오.

연인이면서 누이동생이기도 한 사람이여,

비록 순식간에 사라지기는 하더라도

석양의 상냥스러움, 빛나는 가을의 상냥스러움이 되어다오.3

 

얼마 남지 않은 노력! 무덤이 기다리고 있나니, 탐욕스러운 무덤이다!

아아! 당신의 무릎에 이마를 기댄채 나로 하여금

한껏 잠기게 해다오, 백열의 여름을 그리워하며

만추의 날 그 상냥스러운 황색 광선 속에서!

 

  1. 당시 파리 생활에는 10월이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해서 장작을 저장하는 준비의 달이었다.수레에 실린 장작이 안마당 돌 블럭 위에 던져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초록눈의 미인으로서 여기에 노래되고 있는 것은 보들레르가 그 무렵 누이동생처럼 또 어머니처럼 사랑했던 여배우 마리 도브랑이다. [본문으로]
  3. 바다에 미치는 태양이나 석양의 아름다움에 그 무렵 보들레르가 빠져 든 것은 그의 어머니가 머물고 있던 영국 해협의 옹프루르 해안에서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