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굴원(屈原)

높은바위 2015. 6. 3. 11:10

 

 

    회사(懷沙)

 

           1

 

만물이 생동하는 초여름이여,

초목도 빽빽이 우거졌구나!

아픈 가슴 끝없는 슬픔이여,

허둥지둥 강남 땅으로 간다네.

 

쳐다만 봐도 어질어질,

무척이나 고요하고 소리 없구나.

답답하고 우울한 심정,

시름 겨워 못내 괴롭구나.

정을 억누르고 뜻을 헤아려,

분을 삼키고 스스로 참는다네.

 

           2

 

네모꼴을 깎아 동그라미를 만드는 데도

일정한 법도는 바꾸지 못하는 법.

근본이나 초지를 고치는 것,

군자가 얕보는 거라네.

 

먹줄로 선명히 줄 그은,

옛날의 설계는 변경치 못하고

충정이 깊고 성질이 바른 것,

대인이 기리는 거라네.

 

교수라도 실지로 자르지 않으면,

누가 그 치수의 바름을 알겠는가?

까만 무늬라도 어둠에 놓이면,

청맹과니는 불분명하다고 말하네.

이루(離婁)라도 실눈을 뜨면,

소경은 못보는 줄로 여기네.

 

흰색을 바꾸어 검정이라 하고,

위를 거꾸로 아래라 하는구나.

봉황은 어리 속에 있는데,

닭과 집오리는 훨훨 춤추네.

 

옥과 돌을 함께 섞어놓고,

하나의 평미레로 재려하네.

저 도당들의 비천함이여,

아이고, 나의 지닌 값을 모르는구나.

 

           3

 

무거운 짐을 많이도 실어,

바퀴가 빠지고 아니 움직이네.

아름다운 보석을 품고 있지만,

길이 막히니 보일 데 모르겠구나.

 

마을 개가 떼지어 짖는 건

이상한 사람을 짖는 거라네.

영웅과 호걸을 비방하는 건

본래가 용렬한 짓이지.

 

무늬와 바탕은 안으로 갖춰져,

중인들은 나의 이채로움을 모르고

재목과 원목은 산처럼 쌓여도,

나의 소유인 것을 모른다네.

 

사랑과 정의가 겹치고,

근신과 온후의 덕이 많아도

중화(重華)님1)은 만날 수 없거니,

누가 나의 거동을 이해하겠는가?

 

옛적에도 성군과 현신은 동시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찌 그 무슨 까닭인지 알겠는가?

탕(湯)과 우(禹)2)는 태고적 이야기

아득하여 생각할 수도 없나니.

 

           4

 

원한과 분노를 삭이고,

마음을 억눌러 스스로 참으니

시름겨워도 변치 않으리니,

나의 뜻, 후세의 본보기 될지어다.

 

길을 나아가 북녘에서 묵으니,

해는 어둑어둑 어두워지고

시름을 풀고 서러움을 달래어,

하나의 큰일로써 마감하겠네.

 

           5

 

넘실넘실하는 원수(沅水)와 상수(湘水)3)여,

두 갈래로 굽이쳐 흐르는구나!

기다란 길은 깊이 가려서,

아득한 끝머리 사라지는구나!

 

두터운 바탕과 결곡한 마음,

견줄 데 없이 우뚝하지만

백락(伯樂)4)이 이미 죽었으니

천리마를 어떻게 품평하겠는가!

 

만민은 한 세상 태어나,

각기 제 자리가 있거늘

마음을 잡고 뜻을 넓히면,

내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상심을 덧들여 서럽게 울며,

길게 한숨을 쉬는구나!

세상은 혼탁하여 나를 아니 알아주며,

사람들 마음은 일깨울 수도 없구나.

 

죽음은 물릴 수 없음을 알았으니,

애석히 여기지 말지어다.

분명히 세상의 군자에게 알리노니

내 이제 충신의 본보기가 되련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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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화(重華)님 : 순(舜) 임금의 이름.

2) 탕(湯)·우(禹) : 은나라 시조 탕왕(湯王), 하나라 시조 우왕(禹王).

3) 원수(沅水)·상수(湘水) : 모두 호남성(湖南省) 경내를 흘러 동정호로 빠지는 강물.

    원수는 동정호의 서쪽으로 들어가고, 상수는 동정호의 남쪽으로 들어감.

4) 백락(伯樂) : 고대에 말(馬)을 잘 보던 사람.

    천리마(千里馬, 驥)를 알아보는 재주를 가졌음.

 

 

 

* 굴원(屈原 : B.C.343 ?-277 ?)은 전국시대 때 초(楚)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평(平), 자는 원(原)이었다.

초나라 왕족의 출신으로 회왕(懷王)의 좌도(左徒)가 되어 넓은 견문과 풍부한 지식으로 내정 외교에 밝아, 회왕의 신임을 얻었으나 다른 중신들의 미움을 사서 모함에 빠져 왕의 버림을 받았다.

 

굴원은 일찍이 많은 서책들을 두루 섭렵해서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이 총명해서 20대에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재주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상관 대부 근상(斳尙)이다.

그는 굴원과 지위가 같았는데, 그는 굴원을 매우 질투하고 시기했다.

회왕이 굴원에게 나라를 잘 다스리는 법령을 만들도록 하였다.

굴원이 그 초안을 쓰고 있을 때 근상이 그것을 빼앗아 제 공적으로 삼기를 원했으나 굴원이 듣지 않았다.

근상은 회왕에게 나아가 굴원을 모함했다.

 

“굴원이 학식을 빙자하여 믿고 임금을 업신여기며 무엇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회왕이 신하의 헐뜯고 아첨하는 말에 넘어가 굴원을 멀리 하자 굴원은 깊은 슬픔과 근심에 잠겼다.

굴원은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굴원은 군주의 마음에서 밝음이 사라지고 흐트러짐을 걱정했다.

그러나 굴원은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멀리 쫓겨났다.

올바른 도로 살다가 사악한 무리에게 쫓겨난 굴원은 세상을 한탄하며 <이소(離騷)>를 썼다.

‘소(騷)’는 근심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소’는 걱정스러운 일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굴원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군주를 섬겼으나 헐뜯는 이들의 이간질로 군주의 신임을 잃고 곤궁해졌다.

군주에게 신의를 지키고 충성을 다했으나 의심을 사고 쫓겨났으니 마음에 분통함이 없을 리 없다.

‘이소’는 그 마음의 원통함과 분함을 드러내 보인 시다.

 

후에 회왕이 모략에 빠져 객사하고, 경양왕(頃襄王)이 왕위에 오르고, 아우 자란(子蘭)이 영윤(재상)이 되었을 때, 굴원을 시기하여 대부들을 시켜 모함하자, 경양왕이 노하여 굴원을 양자강의 남쪽으로 쫓아 버렸다.

이에 굴원은 시를 읊으며 강가를 헤매다가, 돌을 가슴에 품고 상강(湘江)의 지류인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멱라수 가에는 굴원의 무덤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굴원의 생존 연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나, 가장 길게 잡으면 위에 소개한 대로 된다.

초나라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그가 죽은 날로 전해지는 음력 5월 5일을 단오절로 정해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삼았다.

<회사(懷沙)>는 그가 강물에 투신하기 전에 남긴 절명시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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