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현대시 감상

63. 낡 은 집

높은바위 2005. 7. 7. 13:04
 

63. 낡 은   집

                   이 용 악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에 산호관제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고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


  찻길이 뇌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의 셋째아들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그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너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가 아홉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옥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1938. ꡔ낡은 집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