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영국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

높은바위 2025. 1. 5. 07:12

 

하나님의 나라

 

오 보이지 않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보며,

오 만질 수 없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만지며,

오 알 수 없는 세계여, 우리는 그대를 알며,

이해할 수는 없어도 우리는 그대를 붙잡는다!

물고기는 대양을 찾기 위해 하늘로 날아오르는가,

독수리는 하늘을 찾기 위해 땅으로 뛰어내리는가--

저 하늘에서 당신 소식을 들었느냐고

운행하는 별들에게 물어보아야 하다니?

회전하는 천체가 희미해 보이는 곳도

우리의 마비된 지각이 비상하는 곳도 아니다--

우리들이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떠다니는 날개가

바로 우리들의 흙덧문을 두드리리라.

천사들은 옛 위치를 지키고 있으니--

다만 돌을 굴리고 날개를 쳐라!

그렇다, 찬란한 광채를 놓치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 그대들의 외면한 낯 때문이다.

 

* * * * * * * * * * * * * *

 

The Kingdom of God

 

O world invisible, we view thee,

O world intangible, we touch thee,

O world unknowable, we know thee,

Inapprehensible, we clutch thee!

Does the fish soar to find the ocean,

The eagle plunge to find the air--

That we ask of the stars in motion

If they have rumor of thee there?

Not where the wheeling systems darken,

And our benumbed conceiving soars!--

The drift of pinions, would we hearken,

Beats at our own clay-shuttered doors.

The angels keep their ancient places--

Turn but a stone and start a wing!

'Tis ye, 'tis your estranged faces,

That miss the many-splendored thing.

 

* * * * * * * * * * * * * *

 

프랜시스 조셉 톰슨(Francis Joseph Thompson, 1859년 12월 16일 ~ 1907년 11월 13일)은 영국의 시인이자 가톨릭 신비주의자이다.

의사인 아버지의 권유로 18세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26세에 작가와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추구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런던의 거리에서 3년을 보내며 천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신경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아편에 중독되었다.

 

1888년 윌프리드와 앨리스 마이넬은 그의 시를 읽고, 아편에 중독되어 노숙자인 작가를 한동안 집으로 데려왔고, 나중에 1893년에 그의 첫 번째 시집 Poems를 출판했다.

1897년에 그는 시골, 웨일스 및 Storrington의 삶에서 영감을 얻어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늘 허약했던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1907년에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 무렵 그는 세 권의 시집과 다른 작품과 수필을 출판했다.

 

톰슨은 랭커셔 프레스턴의 윙클리 스트리트에서 태어났으며, 4일 후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 찰스는 매닝 추기경의 친구였던 형 에드워드 힐리 톰슨을 따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의사였다.

에드워드 힐리(Edward Healy)는 프랜시스의 삼촌인 존 코스톨 톰슨(John Costall Thompson)과 함께 둘 다 저자였다.

프랜시스에게는 유아기에 사망한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11살이 되던 해, 톰슨은 더럼 근처에 있는 가톨릭 신학교인 우쇼 대학에 보내졌다.

연약하고 섬세하며 극도로 수줍음이 많은 소년이었던 그는 1870년 학교 동료들에 의해 '무뚝뚝한', 즉 추상적이지만 충분히 행복한 소년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의사가 된 적이 없었고, 군인으로 입대하려고 했지만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후 26세인 1885년 그는 무일푼으로 런던으로 도망쳐 작가로 생계를 꾸려 나갔고, 그동안 구두 제작자(Panton Street의 John McMaster)와 서점에서 일하고, 성냥을 파는 등 잡다한 일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아편에 중독되었는데, 맨체스터에 있을 때 신경 쇠약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아편을 피우다 중독자가 되었다.

그는 채링 크로스의 거리에서 살았고, 템스 강가에서 노숙자들과 다른 중독자들과 함께 잠을 잤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거절당했는데, 그것은 그가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중독 때문이었다.

 

거의 평생을 가난, 노숙, 아편, 질병에 시달리다, 47세에 결핵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