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러시아

푸쉬킨

높은바위 2015. 8. 31. 08:14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 1799-1837)은 모스크바 출생으로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확립자이다.

명문 중류귀족의 장남으로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大帝)를 섬긴 아비시니아 흑인 귀족이었다.

유년시대를 백부 바실리와 그 친지인 카람진 제코프스키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하에서 자랐고, 1811-1817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차르스코예셀로의 전문학교에 다녔다.

그 곳의 자유주의적 기풍, 나폴레옹 전쟁의 국민적 고양(國民的高揚), 미래의 데카브리스트들과의 교유 등은 그의 사상형성에 커다란 기반이 되었다.

전문학교 재학 때부터 진보적인 낭만주의 문학 그룹 ‘알자마스’에 참가하여, 1814년 시 《친구인 시인에게》를 처음으로 발표하였다.

 

졸업 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혁명적 사상가 차다예프와의 교류, 데카브리스트의 한 그룹 ‘녹색 등잔’에의 참가 등으로, 그의 농노제 타도의 정치사상은 차차 확고한 것이 되었다.

시 《차다예프에게 K Chaadaevu》(1818) 《농촌 Derevnya》(1819) 등도 이러한 배경에서 쓰인 것들이다.

1820년 최초의 서사시 《루슬란과 류드밀라 Ruslan i Ljudmila》를 완성하였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의고전취미(擬古典趣味)에의 통타(痛打)가 되었다.

동년 《농촌》 등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되고, 키시뇨프 오데사에서 살았다.

이 시절에 데카브리스트 남부회의 구성원들과 사귀고, 그들의 사상에 공감을 가지게 됨과 동시에, 서사시 《캅카스의 포로 Kavkazskii plennik》(1822) 《바흐치사라이의 샘 Bakhchisaraiskii fontan》(1823)을 비롯하여, 낭만주의의 특질이 강한 많은 작품을 썼다.

 

1824년 국외 망명에 실패하고 가령(家領)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유폐되어 여기서 서사시 《집시 Tzygany》를 완성, 사실적인 시형소설(詩形小說) 《예프게니 오네긴 Evgenii onegin》(1823∼1830)의 집필을 계속하였고, 비극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 백작》(1825)을 탈고하였다.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은 도리어 시인에게 높은 사상적 ·예술적 성장을 가져다주어, 러시아의 역사적 운명과 민중의 생활 등에 대하여 깊은 통찰의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1825년 12월 데카브리스트 괴멸 후, 그들과 친교가 있던 그는 이듬해 수도로 소환되었다.

친구를 잃었던 수도에서의 고독에도 좌절하지 않고, 1828년 역사시 《폴타바 Poltava》를 완성하였다.

 

1830년에는 보르지노 마을에서 소비극(小悲劇) 4편 《인색한 기사 Skupoi rytsari》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Motsart i Salieri》 《돌의 손님 Kamennyi gosti》 《질병 때의 주연(酒宴) Pir vovremya chumy》, 그리고 《벨킨 이야기 Povesti Belkina》 등을 탈고하였다.

그 해에 《예프게니 오네긴》도 완성하였으며,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는 산문소설 《스페이드의 여왕 Pikovaya dama》(1834) 《대위의 딸 Kapitanskaya dochka》(1836) 등을 써,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문학의 초석을 쌓았다.

마지막 서사시 《청동(靑銅)의 기사 Mednyi vsadnik》(1833)에서는 전제적 국가권력과 개인과의 대립 모순을 조명(照明)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숙명을 제시하였다.

 

1837년 1월 27일 그는 아내 나탈랴를 짝사랑하는 프랑스 망명귀족 단테스와의 결투로 부상하여 2일 후 38세의 나이에 죽었다.

이 결투는 명백히 그의 진보적 사상을 미워하는 궁정세력이 짜놓은 함정이었다고 한다.

푸시킨의 작품은 모두 농노제하의 러시아 현실을 정확히 그려내는 것을 지향(志向)하였으며, 깊은 사상과 높은 교양으로 일관되어, 후의 러시아 문학의 모든 작가와 유파(流派)는 모두 ‘푸시킨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쉬킨의 이전의 러시아 문학은 서구문학을 모방한 좁은 범위의 귀족문학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진실한 러시아 정신, 러시아 사회의 현실적인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러시아에 국민문학을 창시한 것은 바로 이 푸쉬킨인 것이다.

그는 협의의 고전주의 문학을 청산하고, 낭만주의를 거쳐 종국에는 순러시아적인 사실주의의 기초를 쌓았다.

그리고 러시아어의 문학어와 독자적인 예술형식을 후세에 남겨놓은 공적은 불멸하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푸쉬킨의 시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소품이다.

달관된 위치에서 인생을 말하고 있는 듯하나, 그 속에 배어 있는 우울함은 숨길 수 없다.

                                                                                                          (두산백과 참조)

쇼스타코비치 - 버라이어티 스테이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왈츠 2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