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러시아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높은바위 2023. 2. 18. 06:31

 

     침묵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음악이요 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깨뜨릴 수 없는 관계.

 

바다의 가슴은 조용히 숨을 쉬나

낮은 광인처럼 빛난다.

흐린 하늘색 그릇의

거품이 창백한 라일락 같다.

 

태어날 때부터 순결한

크리스털 음성처럼,

내 입술이

태초의 침묵을 얻게 해 주오!

 

아프로디테여, 거품으로 남아 있으라

그리고 말이 음악으로 돌아가게 하라

가슴이여, 마음의 수치를 담아라

삶의 근원에서 합쳐진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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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의 시집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는 1930년대에 쓰인 그의 시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는지를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스탈린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원고를 압수당하고 시들이 전부 불태워졌음에도 그의 시가 남겨질 수 있었던 것은 부인 나데쥬다 덕분이라는 얘기가 그것이다.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남편을 대신해서 나데쥬다는 시인의 작품을 필사하여 지인들에게 계속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미발표 원고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았다.

또한 모든 원고가 압수당할 경우를 대비해 작품의 대부분을 끊임없이 암기했다고 한다.

"입술은 침묵 속에서도 말을 한다"던 만델슈탐 시의 진실은 나데쥬다의 입술에서 증명된 셈이다.

 

어쩌면 모든 시의 운명 역시도 비슷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사람의 몸이 겪어내고 통과함으로써 창안된 시가 지금 세계에서 당장 하나의 논리정연한 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말 이상의 무엇으로 혹은 말 이전의 무엇으로 또 다른 사람의 입술에 남겨지는 방식을 통해 시로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

이러한 생각은 시뿐 아니라 말에 대한 우리의 관점 역시도 달라질 것을 요청한다.

말의 출발과 맺음을 멀리 추상적인 차원에 두지 않고 우리의 몸에 둘 때 누구나의 삶에 깃들어 있는 (결코 그 삶과 분리되지 않을) '말'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발견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이 있을 때 그 말이 비로소 '삶'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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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시프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1891년 ~ 1938년)은 제정 러시아 및 소련의 시인이다.


고로데츠키, 구밀로프와 함께 러시아 모더니즘 학파의 한 분파인 아크메이즘(Acmeism, Акмеизм)의 유명인물 중 하나였다.
 
1891년 01월 14일 러시아령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부유한 유대-폴란드인 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0년 테니세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당시 불법이었던 사회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프랑스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1911년 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유대인은 입학이 허가되지 않았기에 감리교로 개종하고 입학하였다.
다만 학위는 받지 못했다.


1911년 구밀료프, 고로데츠키 등이 주축이 된 "시인 길드"(아크메이스트)를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아내 나데쥬다와 모스크바로 이주하였고, 이후 몇 년 간 비평, 에세이, 번역 활동 등에 전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