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맹호연(孟浩然)

높은바위 2015. 6. 16. 09:18

 

 

        세모에 남산으로 돌아가며(歲暮歸南山)

 

北闕休上書(북궐휴상서)                 북궐(北闕)에 상소는 그만 올리고,

南山歸敝廬(남산귀폐려)                 남산의 고향집에 돌아가자.

 

不才明主棄(부재명주기)                 재주 없어 명군(明君)께서 버리셨고,1)

多病故人疏(다병고인소)                 병이 많아 친구까지 멀어졌다.

 

白發催年老(백발최년노)                 센털은 노년을 재촉하고

靑陽逼歲除(청양핍세제)                 볼빛은 세모(歲暮)를 몰아친다.

 

永懷愁不寐(영회수부매)                 시름이 그지없어 잠 못 이루니,

松月夜窗墟(송월야창허)                 들창에 비치는 건 송월 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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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유(王維)가 맹호연(孟浩然)을 내서(內署)로 불러 현종(玄宗 : 이융기(李隆基))과 면대(面對)하여 시를 지어보라 하여 지은 시로 부재명주기(不才明主棄)에 이르니 현종이 경은 벼슬을 구하지도 않았고, 짐은 경을 버린 적도 없다.

어찌 나를 무함하는고? 하면서 쫒아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 맹호연(孟浩然 : 689-740)은 이름이 호(浩), 자는 호연(浩然)이며, 호북 양양(襄陽 = 현 양번(襄樊))의 소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스로 맹자(孟子)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개원 16년(728)에 고향을 떠나 장안으로 와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그러나 귀향하지 않고 계속 장안에 머물며 벼슬길의 기회를 얻고자 노력하였다.

이 때 맹호연은 왕유와 왕창령(王昌齡)을 만났으며, 의기투합하여 죽마고우인 양 가까워졌다.

 

그러나 벼슬을 하지 못해 실의에 빠진 나머지 그 해 겨울 왕유, 왕창령 등과 이별하고 장안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잠깐 머물러 있던 그는 삶의 번민을 달랠 길 없어 일엽편주를 타고 오월(吳越)을 만유하였다.

오월은 지금의 절강 일대로, 산수가 수려하고 풍광이 명미하여 만유 중에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맹호연의 생활 경력이 비교적 간단하고 시의 내용도 풍부하지 않지만, 그의 산수·전원시는 자연스럽고 맑을 뿐만 아니라 시의 정취가 담아하고 곱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터득한 진리를 매우 담담한 필치로 다시 자연으로 되돌려 표현해 내고 있어, 자아와 분별이 없는 일체를 이루어 냄으로써 무한한 시적 정취를 풍긴다.

Dirk Maas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