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를 거꾸러트린 이태조는 고려왕족인 왕(王)씨를 보는 족족 잡아다 강화도와 거제도에 집단유배를 시켰었다.
그 후 태조 3년 4월에는 유배된 왕 씨를 멸종시키고자, 속임수로 배밑을 뚫고는 배를 태워 집단수장으로 학살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거제도의 왕 씨들은 탈출을 모색하였다.
비정의 학살에서 탈출한, 한 개성왕 씨가 전남 구례(求禮)에 정착하여 숨어 살았다.
그 후 곧 개성왕 씨(開城王氏) 탄압이 풀렸다.
하지만 이조 500년 동안에 문과(文科)에 등과한 수는 겨우 10 명에 지나지 않았다.
벼슬에 있어서도 중종조에, 왕무(王懋)의 아들 시걸(時傑), 희걸(希傑)이 직제학(直提學)과 목사(牧使)를 각각 했을 뿐이다.
탄압받은 유태인들에게 소위 <저항적 발전심리>가 생겨나,
돈을 많이 번다든지, 훌륭한 학자가 된다든지 해서 가치형성을 위한 민족기질이 생기듯이,
탄압받은 왕 씨 씨족에게도 그들의 통성인 저항적 발전심리를 누리게 되었다.
아예 벼슬로부터 소외되었기에 그들의 발전심리는 학문으로 파고든다.
그들의 학문에는 항상 기성모럴에 비판적이었다.
구례(求禮)의 왕석보(王錫輔)도 그런 전형적인 학자였다.
그의 사상인맥(思想人脈)은 두 가름으로, 아들 사각(師覺), 사찬(師瓚),
다시 사각의 아들 동환(東煥)으로 뻗어 내린 개화문맥으로,
한말(韓末)에 왕수환, 왕재소, 권봉수, 박해룡 등으로 전해내려 지방학교운동의 선구인 호양학교(壺陽學校)로 결실하였다.
다른 하나는 문장저항(文章抵抗)과 행동저항(行動抵抗), 그리고 자학저항(自虐抵抗)으로,
한말(韓末)에 가장 행동적인 항일인맥(抗日人脈)으로 뻗었다.
그의 문하생이요, 사상적 영향을 받은 황매천(黃梅泉), 나인영(羅寅永:나철(羅喆)이라 개명) , 그리고 궁내부 비서관으로 헤이그밀사사건을 공작한 김봉선(金鳳善=求禮구례), 해학(海鶴) 이기(李沂=求禮구례)를 들 수 있다.
국권회복을 전제개혁에 두고, 정부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두게 한 것은 해학의 힘이었다.
또 국권회복은 신학문에 있다 하여 장지연 등과 대한자강회를, 그리고 호남학보를 간행하여 계몽도 하였다.
질적인 개혁에 병행하면서, 나인영(羅寅永)처럼 혁명적인 개혁에도 과감하였다.
동학당(東學黨)에 들어, 정부개혁을 꾀하기도 하였고, 일로강화(日露講和) 조약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려 하여, 일본정부를 당황하게도 하였다.
일황을 꾸짖는 그의 한국국권선언은 당돌하기도 하지만 통쾌한 것이었다.
매국오적 암살사건에는 직접 권총을 손에 들기도 하였다.
다시 이 두 갈래 인맥은, 현대화된 여건에 조화되어,
광주학생사건의 주모자요, 그 사건의 모체인 성진회(醒進會) 총무 왕재일(王在一=求禮구례)로 이어지고 있음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