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그외 나라

칠레: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높은바위 2024. 5. 28. 08:18

한 여인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시인 네루다.

 

한 여자의 육체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 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의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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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po de Mujer


Cuerpo de mujer, blancas colinas, muslos blancos,
te pareces al mundo en tu actitud de entrega.
Mi cuerpo de labriego salvaje te socava
y hace saltar el hijo del fondo de la tierra.
 
Fui solo como un tu´nel. De m´ hu´an los p´jaros
y en m´ la noche entraba su invasio´n poderosa.
Para sobrevivirme te forje´ como un arma,
como una flecha en mi arco, como una piedra en mi honda.

Pero cae la hora de la venganza, y te amo.
Cuerpo de piel, de musgo, de leche a´vida y firme.
Ah los vasos del pecho! Ah los ojos de ausencia!
Ah las rosas del pubis! Ah tu voz lenta y triste!
 
Cuerpo de mujer m´a, persistire´ en tu gracia.
Mi sed, mi ansia sin l´mite, mi camino indeciso!
Oscuros cauces donde la sed eterna sigue,
y la fatiga sigue, y el dolor infin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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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여자의 육체〉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가 10대 때 쓴 시다.

나이 열아홉에 펴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Vente poemas de amor y una cancion desesperada)》에 실린 첫 번째 시다.

원하기만 하면, 감정의 모든 것을 녹이거나 꽁꽁 얼릴 수 있는 나이가 열여덟, 혹은 열아홉이 아닐까.

프로이트 식으로 표현하면 리비도가 성기에 집중, 성호르몬의 대사(代謝)가 폭발하는 시기다.

힘의 욕구와 불안이 충돌하는, 어쩌면 미쳐야 온전한, 미치지 않고선 평생 후회가 되는 나이일지 모른다.


 
열아홉의 언어는 어때야 할까.

절제되지 않은 무의식의 거친 생명력을 담은 언어가 10대의 언어가 아닐까.
 
폐결핵을 앓던 20대의 이상(李箱)은 〈성천(成川) 기행〉에서 ‘맥박소리가 이 방안을 방째 시계로 만들어 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쪽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하다’고 썼다.

천재시인 이상의 표현은 20대의 지적 번뜩임이 묻어 있다.
 
30대의 춘원 이광수는 당대 최고 지식인답게 〈금강산유기〉에서 ‘비로봉 올라서니 세상만사 우스워라’고 썼다.

만약 열아홉의 네루다가 춘원이나 이상처럼 썼다면 어땠을까.

 

〈한 여자의 육체〉는 10대의 싱싱한 육체를 언어로 썼기에 오늘날까지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1연의 ‘흰 언덕’과 ‘흰 넓적다리’는 여성의 적나라한 몸을 가리킨다.

월경, 임신, 출산의 공간인 신비한 처녀지다.

1연에서 그 몸을 탐하는 사내는 ‘거친 농부’가 되려 한다.

농부가 이랑을 파듯 ‘너를 파고 들어가길’ 욕망한다.

그 욕망은 은밀한 성적 본능이다.


 
1연이 욕망의 장이라면 2연은 현실의 장이다.

그녀를 생각하는 나는 고독과 무력감에 빠져 있다.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서 몸부림친다.

시인은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고 쓴다.

새들이 화들짝 날갯짓하듯 오감이 타오르고, 어느새 밤이, ‘그 강력한 침입으로’ 시인을 엄습한다.

이 시에서 ‘밤’은 신체적 욕구와 관련된 긴장과 불안, 욕망이 뒤엉켜 팽창하는 공간이다.

시인은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린다’고 표현한다.

‘벼리다’는 단어를 두 번 쓴다.

벼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날이 무딘 연장을 불에 달궈 날카롭게 만든다는 뜻.

이성에 대한 갈망을 뾰족한 활촉, 투석기의 단단한 돌로 표현한다.


 3연은 성적 욕망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장이다.
 
여성의 피부는 몸을 살짝 가린 ‘이끼’와 같다.

그 색은 ‘밀크 빛’이다.

시인은 여인의 젖가슴을 ‘잔(盞)들’로 표현한다.

‘둔덕의 장미’도 너무 노골적이다.


 시인은 4연에서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라고 선언한다.

이어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은 성적 절정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행에서 ‘피로가 흐르며’,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는 표현은 사정(射精) 후의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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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년 7월 12일 ~ 1973년 9월 23일, 향년 69세)는 칠레의 민중 시인이자 사회주의 정치가이다.

파블로 네루다는 1904년 7월 12일 칠레의 작은 마을에서 철도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네프탈리 베틀란’.

그는 19세기 체코 시인 ‘J. 네루다’의 시를 흠모해 자신의 필명을 ‘네루다’로 썼고 나중 이 필명이 법적인 이름이 됐다.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는 열아홉 때 나왔다.

훗날 그는 “연애시가 내 몸 전체에 돋아났던 시절이었다.

(시집은) 앙갚음과도 같은 사랑의 인동향(忍冬香)”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을 공부했지만 학문보다 시 쓰는 일에 더 흥미를 느꼈다.

20대 초에 이미 2권의 시집을 출간해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이자 외교관이 된 그는 주 스페인 영사로 근무했다.

그 시절 프랑코 독재정권이 들어서고,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가 내전 과정에서 처형되자 분노해 반(反) 파시즘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45년 모국 칠레로 돌아온 시인은 공산당에 가담, 상원의원이 됐으나 비합법 정당으로 규정되자 멕시코로 망명했다.

1970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선 뒤 주 프랑스 대사가 됐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 칠레 육군 참모총장이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하자 병상에서 항의 시를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독살설이 제기됐다.

당시 69세였던 네루다는 암 치료를 받고 있었다.

네루다의 운전기사는 “시인이 산티아고 병원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은 뒤 고통을 호소했다”라고 증언했다.


 
40년 뒤인 지난 2013년, 칠레 정부가 타살 의혹을 규명하겠다며 유해를 묘소에서 꺼냈다.

그러나 의혹은 해소되지 않았다.

정부는 타살 증거가 없다고 발표했지만 유족들은 국제 전문가들의 추가 조사를 요구했다.


 
네루다의 유해는 지난 4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120km 떨어진 ‘이슬라 네그라’에 재매장됐다.

이 마을의 본래 이름은 카비요따(갈매기).

그러나 생전 네루다가 그곳에 정착, 많은 작품을 발표한 창작공간으로 알려지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칠레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어 지금도 네루다를 흠모하는 관광객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