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일본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고촌광태랑)

높은바위 2023. 8. 9. 07:15

 

레몬 애가(Lemon 哀歌)

 

애타도록 당신은 레몬을 찾고 있었다.

죽음의 슬프고도 화려한 병상에서

내가 쥐여준 레몬 한 알을

당신의 하이얀 이가 생큼히 깨물었다.

토파즈 빛으로 튀는 향기.

하늘의 것인 듯 몇 방울의 레몬 즙이

당신의 정신을 잠시 맑게 되돌려 놓았다.

푸르고 맑은 눈빛으로 가냘피 웃는 당신.

내 손에 꼬옥 쥔 당신의 싱그러움이여.

당신의 목 깊숙이에서 바람 소리 일지만

생과 사의 어려운 골목에서

그대는 옛날의 그대가 되어

생애의 사랑을 이 순간에 다 쏟는 것인가.

그리고 잠시

그 옛날 산마루에 올라 쉬던 심호흡 하나 쉬고

당신의 모습은 그대로 멈췄다.

벚꽃 그늘이 있는 사진 앞에

토파즈 빛 향기의 레몬은 오늘도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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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순간을 시(詩)로 생생히 기록한 시인이 있었다.

그걸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사람을 사랑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모두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미추(美醜)를 모두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일본의 시인이자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다로(高村光太郞, 1883~1956)는 먼저 죽은 아내를 자신이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이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약속은 십중팔구 사랑의 허언(虛言)이 될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허언을 실천한 사랑은 위대하다.

다카무라 고다로는 영원히 사랑한다는, 아내에게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킨 시인이다.

다카무라 고다로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유일한 이해자이며 동반자였던 아내 지에코(長沼智惠子)를 만나 1914년에 결혼했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진실한 사랑으로 행복했다.



1931년 지에코가 정신분열증으로 투병을 하면서부터 다카무라 고다로는 더욱 아내를 사랑했고, 1938년 아내가 정신분열증에 폐렴까지 겹쳐 사망한 후부터는 더더욱 아내를 사랑했다.

한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정신분열증에 걸린 아내를 7년간 헌신적으로 돌보며, 죽은 아내를 그리며 산 42년 동안의 기록인 그의 시집 〈지에코 초(抄)〉는 일본을 울렸고 지금도 일본인이 애송하는 ‘사랑의 바이블’이다.

죽음을 앞둔 아내는 레몬을 원했다.

남편이 건네준 레몬을 한 입 베어 물고는 잠시 맑은 정신으로 돌아와 푸르고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내 지에코.

슬프고도 화려한 병실에서 토파즈 빛으로 튀는 레몬의 향기로 죽기 전에 남편에게 마지막 웃음을 보여주던 아내, 생과 사가 교차되는 그 순간에 옛날로 돌아가 사랑했던 시간 시간 모두 환하게 불 밝히고 바로 그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다카무라 고다로에게 토파즈 빛 향기의 레몬은 ‘슬픈 노래’(哀歌)인 것이다.

또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영혼의 형벌이 되었다.

하지만 다카무라 고다로는 그 형벌의 시간을 사랑의 시로 새기며 슬픔과 싸워 이겼으니 그의 사랑시는 사랑으로 슬픈 모든 이에게 레몬 향기 그윽한 선물인 것이다.



그에게 생전의 아내라는 여자는 살아갈수록 점점 예뻐지는 여자였다.

‘여자가 액세서리를 하나씩 버리면/왜 이렇게 예뻐지는 걸까./…/여자가 여자다워짐은/이러한 세월의 수업 때문일까./당신이 고요히 선 모습은/진정 신이 빚으신 것 같구나./때로는 속으로 놀랄 만큼/점점 예뻐지는 당신.’(다카무라 고다로의 시 ‘점점 예뻐지는 당신’ 중에서)



남들이 미쳤다고 수군거리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영원한 사랑을 얻었다.

아내의 임종과 주검을 시로 남기며 아내의 죽음까지도 사랑했기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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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1883년 3월 13일 ~ 1956년 4월 2일)는 일본에서 국민 시민으로 알려진 일본의 시인이자 조각가이다.

그의 생애 동안 720여 편에 달하는 자연과 인간, 사랑을 노래하는 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70여 점의 조각 작품을 완성한 조각가로 활약했으며, 이외에도 번역, 평론 등에서 업적을 남긴 예술인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카무라 고타로는 1883년(메이지 16) 도쿄 시타야(下谷)에서 불사(仏師)였던 아버지 고운(光雲)과 어머니 와카[わか, 통칭은 도요(とよ)]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8년 미술학교에 입학하고 1906년 2월에서 1909년) 6월에 걸쳐 미국 뉴욕,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했는데, 이 시기를 통해 예술혼에 눈뜨고 서구 문명과 그 속에서 형성된 근대적 자아를 체득하게 된 고타로는 귀국 후 제2의 고운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의 갈등, 파벌이나 연고(縁故)가 일체를 지배하는 구태의연한 일본 예술계라는 벽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생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귀국 직후 예술 전위 모임인 ‘팬의 모임(パンの会)’에 참여해 질풍노도의 탐미적·데카당스적인 생활을 보냈다.

1909년에는 고마고메(駒込)에 있는 조부의 은거처를 아틀리에로 개조해 예술 활동을 하고, 1910년에는 일본 최초의 실험적 화랑인 로켄도(琅玕洞)를 열기도 했으나, 공조자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2월에 하시모토 야에코의 소개로 지에코를 알게 되는데, 그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나와, 여성 해방을 표방한 잡지 ≪세이토(青鞜)≫의 표지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에 재능을 가진 신여성이었다.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진 두 예술가의 만남은 연애 시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졌다.

고타로의 첫 시집 ≪도정≫은 지에코와 결혼을 앞둔 1914년(다이쇼 3) 10월 출판되었다.

고타로는 지에코와의 연애, 결혼 생활을 내용으로 한 시를 40여 년간 써서 그것을 지에코의 사후 ≪지에코초≫라는 연애시집으로 출간했고(1941. 8), 가난 속에서도 운명적 끈으로 연결된 두 사람의 절절한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 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고타로는 지에코의 죽음 이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 정부의 정책에 찬동하는 시를 써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45년 9월 공습으로 도쿄에 있던 아틀리에가 소실되자 이와테현으로 피난했는데, 종전 후에도 이와테현 시외에 있는 오타무라 야마구치(太田村山口)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며 자기 유적(自己流謫)의 자연 친화적 생활을 보냈다.

1945년 12월 시집 ≪전형≫을 시작으로 자연과 순수한 시작(詩作)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작품들을 발표하는가 하면, 1947년 7월에는 인생을 되돌아보는 내용의 자전적 시편인 ≪암우소전(暗寓小伝)≫을 발표함과 더불어 제국예술원(帝国芸術院) 회원으로 추대되지만 이를 사퇴한다.

 

1950년 11월에는 ≪지에코초 그 후(智恵子抄その後)≫ 시문집을 출판하고, 70세가 되던 1952년 10월에 도와다 호반(十和田湖畔)에 세울 지에코 나부상(裸婦像) 제작을 위해 도쿄로 돌아간다.

1955년 12월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에 시 <생명의 큰 강(生命の大河)>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1956년 4월 화가 나카니시 도시오(中西利雄)의 아틀리에에서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영원한 반려자인 지에코와의 만남과 결혼, 사별은 다카무라 고타로의 인생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으며, ≪도정≫, ≪지에코초≫, ≪기록≫, ≪전형≫, ≪지에코초 그 후≫를 포함하는 그의 7권의 시(문)집은, 일본 근대 시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메이지, 다이쇼, 쇼와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격변기 속에서 한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 내고자 했던 시인의 인생 기록으로서 크나큰 감명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