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한국의 치부(恥部) 유자광(柳子光)

높은바위 2025. 5. 27. 06:45

 

세조정난공신인 유자광(柳子光)은 선비를 대량학살한 갑자사화의 원흉이요, 연산(燕山) 악정에 영합하는 등 보신(保身)을 위한 지조무화(無化)의 전통적 한국의 치부(恥部)를 대표하는 표본적 인물이었다.

 

중종반정은 이 연산악정에 대한 쿠데타였고, 갑자사화에 죽은 선비들의 복수 쿠데타였다.

그러기에 유자광은 연산군 다음으로 쿠데타에 의해 제거돼야 할 인물이었다.

한데 유자광은 반정 후에도 계속 세도를 누렸고, 오히려 그 반정공신(反正功臣)으로 녹훈(錄勳)되기까지 하였다.

역사의 익살도 이에 더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같은 역설의 처세(處世)를 해내는 그 인물자체에서 한국인의 전통적인 제거돼야 할 부정적 가치의 성향을 짚어볼 수가 있겠다.

 

그가 중종반정에서 제거되지 않았음은 반정의 수모자(首謨者)인 성희안(成希顔)과 박원종(朴元宗)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사실 유자광은 당세만은 역사에서 같이 간사하고, 무지조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사귐성이 좋고, 진취적인 새것에 모험을 싫어하고, 안이한 옛 것에 안도를 좋아하는, 대체적인 한국인 성향의 공약수를 무기로 행동하는, 그리고 비현실적인 합리성보다 비합리적인 현실성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중종반정의 공훈을 정하는 날, 유자광은 그와 같이 무인출신으로서 동지의식이 있는 박원종을 찾아가, 자기는 이미 선조(先祖= 燕山朝연산조) 때 녹훈이 되었으니, 또 한 번 녹훈의 영예를 원하는 바도 아니요, 또 선조녹훈에 금조녹훈이 겹친다면 명분도 서지 않으니 이번 녹훈에서 자기를 빼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의 겸손함이 매양 이러하였다.

박원종이 유자광을 녹훈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던지, 또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던지는 알 길이 없었다.

비록 생각하지 않고 있었더라도 이 같은 겸손에는 당시의 정치적 역학이 작용하여 박원종을 측은하게 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박원종이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니, 굳이 녹훈하려거든 자기 아들 유방(柳房)에게 물려주고, 이 몸은 받지 않겠다고 겸손 속에 음모의 가시를 드러낸 것이다.

이같이 하여 유자광은 녹훈심사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게 되고, 막상 녹훈을 정하는 자리에서 아들과 더불어 자신도 녹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고차적 수완을 보인 것 등은, 그의 수완의 좋은 본보기인 것이다.

 

그때 박원종이 자광에게 또 속았다고 당시 사람들이 글로 남겨놓고 있음을 본다.

―정묘년에 조정이 유자광을 배척하자, 자광이 박원종을 보고 충동하기를, 나와 공이 다 같이 무인(武人)으로 숭품(崇品)에 올랐으매, 문사(文士)들이 기뻐하지 않은 이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찬 법이라 내가 배척당하고 보면, 마음으로는 공에게 미칠 것이오.<<平城墓誌평성묘지>>

이 역시 유자광의 보신처세를 잘 말해주는 것이 된다.

그는 많은 문인의 바다 가운데 자기들 둘이서 무인의 고성을 지키고나 있는 듯, 동류 동지의식을 권력자인 박원종에게 불러일으키고, 자기가 바로 박원종을 보호하는 입술임을 자처하여 보신을 도모하려는 그의 명분은 천재적이 아닐 수 없다.

 

―유자광이 바닷가에서 궁하게 살다 죽었다.

죽기 전에 두 눈이 모두 먼지 두어 해가 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 조정에서 그의 자손에게 거두어 장사 지내기를 허락했으나, 아들 진(軫)은 슬픔을 잊고 여색(女色)에 빠져서 마침내 가보지도 않았고, 아들 방(房)도 또한 병을 칭탁하고, 손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아비장사를 보지 않더니 마침내 모조리 망해버렸다.<<陰崖日記음애일기>>

 

유자광은 말년에 자신의 죄악에 뉘우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자기가 죽은 후에, 반드시 자기가 담긴 관(棺)에 형이 내릴 것을 예견했다는 것이 그 뉘우침의 방증이 된다.

이 뉘우침을 대의적인 것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끝내 자기답게 소인적(小人的)으로 해결했음을 본다.

그는 죽기 전에 그와 비슷하게 생긴 늙은 종을 하나 사서 데리고 있었다.

그 종이 죽자(죽였다는 설도 있으나 유자광을 미워하여 조작된 설인 것 같다) 대부(大夫)의 묘제(墓制)대로 관곽(棺槨)과 석물(石物)을 구비하여 묻었다.

그런 뒤에 자기가 죽음에 임박하자,

"내 묘는 봉분을 하지 말고 평장(平葬)으로 하라. 만약 너희가 살아 있을 때 조정에서 와서, 나의 무덤을 묻거든 종의 무덤을 가르쳐 주고 후세에도 그렇게 가르쳐 주라고 유언을 하라."라고 유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활한 예견은 들어맞았다.

조정에서 죽은 유자광의 관을 쪼개는 형이 내리고, 금오랑(金吾郞)이 와서, 유자광의 무덤을 물으니, 가족은 종의 무덤을 가르쳐 주어 유자광의 무덤은 무사하였던 것이다.

유자광이 만큼 현세와 내세를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더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