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ㅍ

파도

높은바위 2023. 5. 26. 16:36

큰 물결. 수련이나 시련, 또는 그리움을 상징하기도 함.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그리움', "유치환시선", p. 83)

아,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섞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바다의 글라스여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아,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아, 여기 누가 性(성)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아,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일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김현승, '파도', "현대문학", 1967년 10월)

한 마리 자벌레

산이었다가 들판이었다가

구부렸다 폈다

대지의 끝에서 끝으로

이 우주 안 작은 파도 (이성선, '파도', "벌레 시인", p. 16)

무수한 아이가

우짖는

엄니소리

달려가는 엄마와

달려오는 아이와

얼싸안는

엄니와

아이와

영원에서

영원으로

始終(시종)을 모르는

엄니......

소리

수평선

파라한 하늘가엔

울다 지친

파도 한 점 (최규창, '파도', "어둠 이후", p. 72)

단 한번의 사랑을 위하여

성난 코브라와도 같이 매서운 열기로

저 먼 해원에서 달려와

부딪혀 검푸른 바다마다 제 몸 부수는

독한

그리움

바다의

불꽃송이 (박진숙, '봄 파도', "다른 새들과 같이", p. 21)

너는

약속도 없이 맨발로 와서

외쳐댄다

살아가는 일은

바위를 깨는 일이라고

끝없이 멍이 드는 일이라고 (김지헌, '방파제에서', "다음 마을로 가는 길", p.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