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대중음악 특히 록 음악의 역사는 1950년대 로큰롤(rock'n'roll)에서 출발했고, 로큰롤의 영웅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1950년대 미국은 군산 복합체를 중심으로 경제가 성장했고, 대중문화는 이런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성 담론을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엘비스는 백인이면서도 흑인 음악의 본고장 멤피스 출신답게 흑인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으며, 제임스 딘 등 영화배우들의 섹스와 반항의 이미지를 대중음악에서 구현했다.
엄숙한 학교생활에 찌든 10대는 마이크 앞에서 부동자세로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만 보다가 마이크와 허리 아래를 교묘하게 흔드는 엘비스를 보고 열광했다.
그러나 엘비스는 영화배우로 진출하면서 초기 음악의 싱싱한 정신을 잃었으며 군에 입대하면서 로큰롤의 막도 함께 내렸다.
1960년대 미국의 경제는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계를 갖추었고, 각 가정은 냉장고 ․ 세탁기와 두 번째 자가용을 갖추었다.
그러나 정치면에서는 대내 민주주의와 대외 제국주의를 기본 전략으로 삼는 군산 복합체에 대한 도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틴 루터 킹이 흑인의 시민권 운동을 주도했고, 대학에 들어간 베이비 붐 세대가 흑인의 시민권 운동과 베트남전 반대 운동을 지지하고 나섰다.
1960년대를 개막한 대중음악은 밥 딜런이 대표하는 포크(folk)였다.
밥 딜런은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저항 음악을 노래했으나 포크의 열풍은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으로 빠르게 식었다.
1964년 이후 미국 음악계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등 영국 음악가들이 미국 시장을 강타한 ‘영국 침공’ 시기였다.
비틀즈의 이미지는 촌스럽게 하모니카를 반주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매우 소박한 아마추어리즘과 장발이 상징하는 패션을 결합한 것이었다. 비틀즈는 기성 질서에 반항하고 소비문화를 조장하는 두 얼굴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영국 침공이 있을 무렵 수천 명의 히피족(hippies)은 샌프란시스코 주변에 몰려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히피들은 대부분 백인 중산층 출신이었으나 자기들의 성장 배경인 부르주아 가치를 물질에 찌든 문화라고 비판했으며 새 문화를 모색하기 위해 ‘마음을 확장하는’ 마약을 사용했다.
한편 1960년대 후반에는 대학생들이 베트남전에 반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대중음악에서 이 시대를 대표한 사건은 1969년 베트남전에 반대한다는 통일된 명분 아래 뉴욕 근처에서 3일간 30만 명의 청중이 모인 ‘우드스톡 음악 예술 잔치’였다.
이 잔치가 낳은 최고 스타는 지미 헨드릭스였다.
지미 헨드릭스는 불경스럽게도 미국 국가를 연주하면서 전기 기타로 헬기 날아가는 소리, 폭탄 터지는 소리 등 베트남전을 묘사했다.
그러나 우드스톡의 활기찬 분위기는 닉슨 대통령이 캄보디아에 미군을 파견했다는 발표를 듣고 대학생들이 시위를 벌이자 군인들이 발포하여 4명이 죽으면서 암울해졌다.
1970년대 미국은 월남전 패배와 에너지 위기로 불황 없는 경제가 막을 내렸다.
미국 경제는 저임금을 착취하기 위해 제조업을 세계화했으며, 덕분에 정치권력과 경제 기업이 결탁한 국가 독점 자본주의가 후진국에 수입되어 우리나라의 유신 정권처럼 개발 독재의 형태로 나타났다.
미국은 1970년대 중후반에 경제가 다시 활성화했고 이는 1960년대의 저항적 대학생들을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 떼어 내어 자기의 물질적 풍요를 중요시하는 여피족(yuppies)으로 바꾸어 놓았다.
대중음악도 정치 메시지를 담은 노래가 퇴조하고 엘튼 존이 대표하는 부드러운 발라드(ballade) 풍의 노래와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래볼타가 패션의 전형을 제시한 사치스러운 디스코(disco)가 성행했다.
1970년대에 록의 저항 정신을 이어 받은 적자는 펑크(punk)였다.
펑크는 너무 순진하여 어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숙맥을 가리킨다.
펑크에 열광한 세대는 베이비 붐 이후 10대였다.
펑크는 이 새로운 10대의 실업 ․ 가난 ․ 좌절 등을 반영하여 악을 쓰는 멜로디와 기성세대를 협박하는 노랫말이 특징이었다.
펑크의 대표 그룹인 영국의 섹스 피스톨즈는 왕실을 비꼬는 노래 등을 부르며 기성 질서를 조롱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액의 돈을 제공하겠다는 상업 자본의 공략에 무릎을 꿇고 해체되었다.
1980년대 미국 경제는 구조 재조정 시기 곧 산업 사회에서 정보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통화 관리․금리 조작 등 경제 정책을 특징으로 하는 레이거노믹스 아래서 복지 정책은 후퇴했고 사회는 보수화했다.
미국 산업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포기하고 상품을 고급화했으며 중산층 이상이 사치를 일삼는 과소비 문화가 나타났다.
1980년 미국의 대부분 가정은 2대의 TV를 갖추었으며, TV와 함께 자라난 10대는 하루 평균 3~4시간씩 TV를 시청하면서 비디오 열기에 민감해졌다.
신문 ․ 책 심지어 록 잡지도 읽지 않는 25세 이하의 세대를 겨냥하여 1981년 음악 전문 채널 MTV(Music Television)가 설립되었다.
MTV가 낳은 최고 스타는 마이클 잭슨이었고, 1982년 내놓은 앨범 <스릴러 Thriller>는 1984년까지 4천만 장이나 팔렸다.
마이클 잭슨의 노래는 어린이, 어른, 흑인, 백인 모두가 좋아하는 메시지를 담았으며 덕분에 1984년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0년대에는 신세대 또는 X세대가 록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 세대는 어두운 경제 상황 속에서 자랐으며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많은 수가 직업을 얻지 못했다.
더욱이 이혼과 폭력으로 얼룩진 미국 가정은 X세대에게 좌절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이들은 조직 폭력에 쉽게 물들고 분노에 찬 공격적 음악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룹 메탈리카가 대표하는 트래시(thrash) 메탈과 그룹 니르바나가 대표하는 그런지(grunge) 록 또는 얼터너티브(alternative) 록은 가족 ․ 형제 사이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중산층 출신 백인의 좌절을 반영했다.
한편 흑인의 저항은 랩(rap)으로 나타났다. 랩의 뿌리는 이미 1970년 후반부터 디스코의 범람에 반작용하여 나타난 힙합(hip-hop)이라 부르는 거리 문화였다.
뚱뚱한 아버지의 바지를 입은 듯한 힙합 바지, 창을 세운 야구 모자, 테니스 화, 헐렁한 티셔츠 등 힙합 패션을 한 흑인 소년 ․ 소녀는 거리의 속어를 지껄이는 디제이들 곧 래퍼들을 본받아 자기들만 알아듣는 속어를 남발하고 지하철과 빌딩을 캔버스 삼아 낙서하며 돌아다녔다.
1980년대 후반 경제 사정이 더 나빠지자 래퍼들은 갱들의 폭력 생활도 그리기도 했으나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래퍼들은 갱스터 랩을 포기하고 흑인의 자부심과 건강한 삶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미국에서는 불만에 찬 젊은 백인과 흑인이 결합하여 신세대를 위한 록을 부르짖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쯤이면 랩과 메탈이 미국 밖으로 확산되어 전 세계 청소년의 감성을 통일하기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헤비메탈 그룹 시나위 출신인 서태지가 이 흐름을 거의 시차 없이 정확하게 짚었다.
쉬즈곤 - 스틸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