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와 시어(詩語)/ㅂ

바람(風)(3)

높은바위 2025. 3. 2. 07:05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흐름. 바람은 가변성과 역동적 속성으로 인해 인간의 존재성을 일깨워주는 촉매가 되는가 하면 자유와 방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편 바람은 수난과 역경, 시련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바람은 어떤 대상이나 이성에 마음이 이끌려 들뜬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창문을 덜컹거리며 바람은 보이지 않고

덜컹거리는 소리만 들었다

바람을 본 적이 없다

......(중략)......

바람은 발목이 없다

누구도 그것을 잡은 적은 없다

한밤중 덜컹거리는 소리만

아득히 소문으로 들었을 뿐 (고영조, '바람', "감자를 굽고 싶다", p. 43)

 

 

삼백 예순 닷새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살림살이가 그렇고 세상살이가 그렇고

지나가는 바람 앞에 무릎 꿇어 엎드려 빌며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때로는 무참히 꺾이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바람따라 쉽게 흘러가기도 하는

젖은 옷자락과 헝클린 머리카락

몇 천 년의 한이 실꾸리로 풀린다. (김석규, '바람에 대하여', "우울한 영혼의 박제된 비상의 꿈", p. 44)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一平生(일평생)이 落果(낙과)처럼 흔들린다. (강은교, '自轉자전· Ⅰ', "풀잎", p. 30)

 

 

그리고 긴 긴 겨울밤이 오면

내 스스로 걸어 나가리라

흰 눈 덮인 들숲의

가막새 까욱대던 거기

바람을 찾아

가고 또 가리라

뼈로서

겨울밤을 지새우리니

뼈와 바람만이 棲息(서식)하는 그곳을

나는 믿는다

어디서 피벗은 바람이

골수에 사무쳐서

외오곰 죽은 魂(혼)이 내는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려 오는구나

나는 믿는다 바람을

바람이 내는 곧은 소리를

거기 흰 눈 뿐인 들판을

내 가고야 말리니

말탄 바람이여 이 밤에 나를 태워

아프게 아프게

채찍을 쳐라 (정희성, '바람에게', "踏靑답청", p. 58)

 

 

바람이 내 뒤안

수풀을 흔들고

그윽한 深淵(심연)의 유리가

바다 물결처럼 울어 온다.

 

몸뚱이는 차다. 아아

거친 이 설레임에

나는 내 안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노라.

 

(중략)

 

바람도 떠가는 달도

흐르는 별도 헤어진 옷도

다만 지나는 시간을 말할 뿐.

 

오오. 불어 제쳐라.

바람. 내 몸에 걸친

남루(襤褸)가

홀짝 벗겨질 때까지. (신석초, 바람부는 숲', "신석초시전집", p. 116)

 

 

누가 내 옥피리에

소리를 가득 채우랴.

누가 내 목숨의 잔에 술을 부어

누에가 실을 뽑아 비단 깁듯

하늘에서 가져온 언어로

시의 노래를 뽑을 수 있으랴.

밤의 외로운 귀가 잠들지 못하고

깨어 듣고 있다.

쓰기만 하면 시를 완성시키는

그런 손을 다오.

울기만 하면 노래가 되는

가슴의 악기를 다오.

울기만 하면 노래가 되는

가슴의 악기를 다오.

죽는 날까지 하늘의 목마름을

나의 목마름으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풀잎 같은 시인으로 살고 싶다.

항시 강물에 시를 쓰는

갈대로 울며

바람으로 울며 살아가고 싶다. (이성선, '바람으로 울며', "별까지 가면 된다", p.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