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고려시대 깡패 이야기

높은바위 2024. 8. 14. 07:32

 

폭력을 쓰면서 못된 짓을 하는 무리를 깡패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악소(惡少)라 불린 깡패가 많았었다.

조직깡패도 있었는데 이 조직깡패의 파워를 왕이나 세도가들이 이용하기까지도 하였다.

이 고려조의 악소(惡少)에 관한 기록은 혼란했던 시대에 주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의 혼란과 깡패와는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高麗史) 정국검전(鄭國儉傳)>에 보면 정국검이 직접 이 악소들의 행패를 목격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집은 개성 수정봉(水精峯) 아래 있어 음침하고 험한 산길을 더듬어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그 길목에서 맵시가 고운 부녀자들이, 달려드는 대여섯 명의 악소들에게 겁탈당하는 것을 종종 목격하였다.

 

어느 하루 가사(袈裟)에 검은 베로 성장을 한 젊은 여인이 복면한 이 악당들에 의해 봉변을 당하는데,

사위인 내시(內侍) 이유성(李維成)과 영동정(令同正) 최겸(崔謙)과 가노(家奴)들을 보내어 불량배인 악소(惡少)를 붙잡아 치죄하게 하였다.

그중 세 놈을 잡아와 심문을 해보니 놀랍게도 대장군 이부(李富)의 생질을 포함한 권신무신의 자제들이었던 것이다.

원윤(元尹) 벼슬의 신여계의 처 김 씨도 비녀를 거느리고 길 가다가 이 악당 10여 명에게 겁탈을 당했고, 그들을 쫓아가 단 하나만 잡아왔는데, 바로 당시 충숙왕의 총을 입어 세도가 당당했던 권준의 가문 아이라, 순군(巡軍)들이 겁에 질려 다스리지 못했다 <고려사 권 107 권준전>.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 여말의 이지러진 정치 및 사회풍토에서 버섯처럼 돋아난 악소배가 조직적으로 파워를 형성하였고, 이 파워를 악랄하게도 권문(權門)이 이용하였음을 본다.

공민왕을 세자 때 원나라에서 모셨던 여세로 조일신이, 그의 횡포를 반대하는 기철, 기륜, 기원 등 명신들을 암살할 때 악소들을 모아 행동대로 삼았으며, 정치적 도구로 삼고 있었고, 이들에게 대사가 이뤄지면 벼슬까지 약속했다.

또 충혜왕 때는 신궁을 지을 자금 명목으로, 악소들을 동원해 민가의 우마를 폭력으로 징발해 목재를 운반하고, 그 대가로 민가의 약탈을 허락했다 <고려사 권 124 노영서전>.

충혜왕은 이 깡패들을 그의 호위병으로 삼아, 매사냥등 출타할 때 거느리고 다녔고, 고신(告身)이라는 일종의 임명장을 주어 특권을 부여하기까지 하였다.

왕의 그늘아래 이 깡패들의 횡포는 염리(廉吏)의 닭과 개를 잡아먹는데서부터 부녀 및 재화 약탈까지 혹심하였다.

조익청은 이 깡패의 두목인 송팔랑, 홍장 등을 잡아 가두어 처벌하려 했으나, 충혜왕이 오히려 조익청을 제주 안무사란 외직으로 좌천시켰다.

 

이 깡패의 폐단에 눈을 뜬 충숙왕은  소극적으로나마 단속을 시작하여, 송팔랑, 홍장 등을 잡아 가둔 일이 있고, 충목왕 때에 이르러서는 악소의 신분보장인 고신(告身)을 거둬들여 조직깡패를 불법화시켰다.

이조 초기까지도 이 조직깡패가 있었으며 그 후 조혼습속이 국속(國俗)이 되면서부터 깡패가 될 수 있는 연령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여 절로 스러져버린 것이다.

세상의 역사는 백성위에 군림했던 폭군과 그 주위의 패거리 깡패들의 말로(末路)를, 그 당대는 물론 사후 후대에까지 그 더러운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