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중국

조조(曹操)

높은바위 2025. 6. 14. 06:36

 

고한행(苦寒行)

 

北上太行山(북상태행산) : 북으로 태행산에 오르니

艱哉何巍巍(간재하외외) : 어려워라, 어찌 이리도 높은고

羊腸阪詰屈(양장판힐굴) : 구절양장 굽은 기슭 울퉁불퉁

車輪為之摧(차륜위지최) : 수레바퀴도 부서지는구나

樹木何蕭瑟(수목하소슬) : 나무는 어찌 이리도 쓸쓸한지

北風聲正悲(북풍성정비) : 북풍 바람소리는 슬프기만 하다

熊羆對我蹲(웅비대아준) : 큰 곰은 나를 보고 웅크리고

虎豹夾路啼(호표협로제) : 호랑이는 좁은 길에서 으르렁거린다

溪谷少人民(계곡소인민) : 계곡엔 사람이 적고

雪落何霏霏(설락하비비) : 눈은 어찌 이리도 날리어 떨어지는지

延頸長嘆息(연경장탄식) : 고개를 뽑아 길게 탄식하며

遠行多所懷(원행다소회) : 멀리 걸어가지 감회가 무량하다

我心何怫郁(아심하불욱) : 내 마음 어찌 이렇게도 울적한지

思欲一東歸(사욕일동귀) : 마음은 오로지 동으로 가고 싶구나

水深橋梁絕(수심교량절) : 물은 깊은데 다리는 끊어져

中路正徘徊(중로정배회) : 길 가운데서 머뭇거린다

迷惑失舊路(미혹실구로) : 미혹하여 옛 길을 잃어버려

薄暮無宿棲(박모무숙서) : 날이 저무니 묵을 곳이 전혀 없구나

行行日已遠(행행일이원) : 걷고 또 걷는데 해는 이미 기울고

人馬同時飢(인마동시기) : 사람과 말이 모두 배가 고프구나

擔囊行取薪(담낭행취신) : 배낭을 진채로 걸으면서 땔나무를 주워

斧冰持作糜(부빙지작미) : 얼음을 캐어 죽을 끓인다

悲彼東山詩(비피동산시) : 저 슬픈 동산의 시가

悠悠令我哀(유유령아애) : 아득히 나를 애처롭게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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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중국어: 曹操, 병음: Cáo Cāo 차오차오, 155년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의 관료, 정치인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군웅할거의 난세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를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 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훗날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할 기틀을 닦았다.

삼국시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난세의 간웅(奸雄)이자, 민간인과 포로를 학살한 인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자는 맹덕(중국어: 孟德, 병음: Mèngdé 멍더)이며, 어릴 때 이름은 길리(吉利), 소자(小字)는 아만(阿瞞)이다.

사후 위가 건국된 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위나라 역사가 배잠(裴潛)은 난세를 대표하는 창천(蒼天)의 간웅이라 평가하였다.

 

조조는 가신인 하후돈, 하후연과 함께 후한 예주 패국(沛國) 초현(譙縣) 출신이다.

중상시(中常侍, 환관의 한 직책) 조등(曹騰)의 양자인 조숭(曹嵩)의 아들이다.

《삼국지》〈무제기〉에 따르면, 전한 시대 유방(劉邦)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曹參)의 후손인 조등은 환제 때 중상시를 맡았다.

이에 대해 《후한서 》〈조등전〉에 조참의 후예라는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조참 후예설을 위의 선양을 윤색하고 조씨 가문을 격상시키려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조등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삼국지》〈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따르면, 조숭이 본래 하후씨이며 하후돈(夏侯惇)의 숙부라는 이야기도 있다).

 

조조의 가장 큰 단점으로는 잔혹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조조 일생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오점을 남긴 서주 대학살이나 여포군이나 원소군 포로 학살 등 조조는 군사 민간인 가리지 않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학살한 학살자이다.

그 외에도 여백사 사건이나 황제의 아이를 밴 동 귀인을 반란 혐의로 죽이거나 복 황후 살해, 그리고 길본의 난 때는 불을 껐다는 이유만으로 관료들을 반란군으로 몰아 죽이는 등 상당히 잔혹한 행보를 평생 보여준다.

 

혹자는 조조의 이런 행태를 마키아벨리즘이라고 옹호하지만, 정작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키아벨리즘으로 옹호하기에 조조의 행태는 냉혹하기는 했지만, 마키아벨리즘의 핵심인 도덕성을 넘어서는 이득 부분이 거의 없다.

우선 서주에서 벌인 학살도 결국 서주에서 그렇게 학살했는데도 도겸의 세력은 무너지지 않았고, 학살을 벌이느라 본거지 연주 전체를 상실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그 뒤로 유비, 여포를 거치면서 조조의 후방을 10년 가까이 위협하는 세력이 되어버린다.

 

동 귀인의 경우도 임산부를 살해하는 잔혹성은 둘째로 치더라도 조조가 황제의 간청마저 무시하고 후궁과 황제의 자녀를 살해한 행태는, 조조가 황제의 보호자가 아닌 황제를 위협하는 권신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고, 이런 행태로 한나라의 관료들과 황실은 조조에게 완전히 등을 돌린다.

그리고 동 귀인 처형 당시 조조는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 중이었는데 조조의 이런 행태는 상대방 원소에게 매우 큰 명분을 주게 되어 원소는 조조를 황제를 능멸하는 역적이라고 주장했고, 이에 유비, 유표 등 유 씨 황족은 물론 상당수의 한나라 관료까지 원소에게 동조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뒤로도 수시로 잔혹한 행보를 이어나갔지만, 이런 행태 때문에 역으로 불만은 더 커져 허도와 업에서는 조조가 약해질 때마다 반란 시도가 수시로 일어났다.

 

한편 조조의 행태인 냉철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조조는 자주 감정적인 행동을 보여주는데 먼저 서주에서 학살을 벌이는 중에 연주에서 장막, 여포의 반란이 벌어지는데도 학살에 빠져있다가 연주가 거의 함락되기 직전에야 학살을 멈추고 돌아왔고, 그 외에도 장수가 항복했을 때 장수의 가족인 추 씨를 취하려 하다가 분노한 장수의 역습으로 아들과 전위를 잃고 본인마저 죽을 위기에 빠진 점, 동 귀인을 죽일 때도 원소와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황제를 무시하고 황제의 아이까지 바로 살해하고, 길본의 난 때는 한나라의 관료들을 깃발 놀이로 처형시키는 등 오히려 조조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상당히 자주 보여줬고 그럴 때마다 큰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으로 들 수가 있겠다.

주불의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자기 사람으로 쓰게 해 달라는 조비의 간청도 거부하고 주불의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철저히 겉과 속이 달라서 그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참모나 신하는 극소수였을 정도였는데 순욱이나 곽가, 그리고 사마의 같은 책사들 말고는 쉽사리 조조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물이 드물었고, 이것이 조조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그의 패업 성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성이 너무 없다는 혹평도 피할 수가 없다.

혹자가 말하듯 존경할 수는 있으나 좋아하긴 어려운 인물이었다.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조조라는 인물이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보니 그런 포악한 면모도 있어서였을 수도 있으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