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丁克仁)의 향치주의(鄕治主義)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 1401년 ~ 1481년)은 세종 때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문종 때 학행으로 추천을 받았다.
1453년 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에 이르렀으나,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사퇴하고 고향인 태인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472년 성종 때 후진 양성에 노력한 공으로 3품 교관이 되었다.
한국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을 지었으며,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불우헌집》이 있다.
그는 늘그막에 등과 하여 나이 70에 정언(正言)으로 하직, 태인에서 살면서 속칭 향치(鄕治)에 수범을 보였다.
향치라 함은 지방관치(官治)가 아니라 지방자치(自治)를 뜻하며 미비한 행정력의 보비를 위해 현군은 이를 특히 장려했고, 또 현국자들은 이를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를 알았던 것이다.
사실상 중앙행정력이 미치는 한계는, 행정조직의 최하단위인 현(縣=지금의 군 단위)에 머물렀고, 옛 지방행정의 5대 요소인 경찰(警察), 징세(徵稅), 과역(課役), 권농(權農), 교화(敎化) 가운데 백성의 의무적 요소인 경찰, 징세, 과역만이 전부였고, 권농, 교화 요소는 사실상 한국의 말단행정에서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이 권리적 요소는 그 촌락단위의 뜻있는 선비의 아량에 의해 행해지기도 또 행해지지 않아지기도 했다.
이 자치적 권농, 교화를 향치라 속칭했고, 그런 향치가 두드러진 사람에게는 여느 관리처럼 벼슬을 가자(加資)해주고, 또 그 지방 감사(監司)로 하여금 의식(衣食)을 도우게도 했던 것이다.
정극인도 70에 하직하고 내려와 향약(鄕約)을 정하고, 향음주례(鄕飮酒禮)로 공동의식을 개발하였으며, 불우헌곡(不憂軒曲 : 조선 시대, 1472(성종 3)년에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이 지은 경기체가. 모두 6장으로, 성은(聖恩)의 망극함과 전원생활의 즐거움, 교육의 보람 등을 읊었다.) 등을 지어 정서도야와 노래에 의한 지역사회의 공동운명성을 함양시켜 그 교화가 팔도에 소문났었던 것이다.
그랬기로 이 향치가 높이 평가받아 삼품관(三品官)을 제수받았으며 비관록(非官祿)을 죽도록 받는 영광을 입은 것이다.
이 향치제도는 우리나라 행정제도나 자치제도 연구에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변천을 따지는 사상사 연구에도 새로운 개척의 소재가 되리라고 보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