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寶城)의 열녀들과 또 다른 사랑 이야기
보성(寶城)의 진주 소 씨(晉州 蘇氏) 삼여걸(三女傑)은 상향(上向)성 양성(陽性) 기질의 표현이다.
정유난(丁酉再亂:1597년, 선조 30년)에 왜적이 소안전(蘇安田)의 처 황(黃) 씨를 겁탈하려 들었다.
손으로 앙칼스럽게 할퀴자 군도로 팔을 잘라버렸다.
발길로 머리를 차 실신시키자 발을 잘라 버렸다.
소몽참(蘇夢參)의 처 김 씨(金氏)는 달려드는 왜적의 국부를 물어 죽였다.
소동하(蘇東河)의 처 조 씨(趙氏)는 겁탈저항에 왜적이 눈알을 빼자, 흐르는 피를 받아 적의 안면에 뿌리고, 허둥지둥한 틈을 타 도망쳐 나와 투신했다.
임란에 왜적이 <조선의사(朝鮮義士)>라고 유일하게 존대한 송제(宋悌=高興고흥)의 처 구(具) 씨는 손가락을 끊어, 방벽에 의시(義詩)를 써놓고 죽었다.
의병 박제(朴悌)의 처 송 씨(宋氏=宋象賢송상현의 從姑母종고모)는 남편 따라 보성전투에 종군하여 화살을 날라주다가 전사하였다.
이곳 열녀들은 자기 혼자의 순결을 지키고, 또 남편이나 가문의 명예만을 위해서 죽어간 많은 열녀와는 달리, 상향성의 야성기질이 완연한 죽음을 택하였다.
이 지역에 옛부터 백정이 많이 살았음은 계급의식이 심하지 않았던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풍(儒風)의 숨 막힌 내륙보다는 한결 숨결이 부드러운 사회풍토의 해변을 찾아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인권운동인 백정파워가 가장 빨리 형성된 곳도 남해안지방이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1504년에 연산군이 어머니 윤 씨의 폐비 사건과 관련된 신하들을 학살한 사건)에 거제도로 유배당했던 교리(校理) 이장곤(李長坤)이 계급을 초월한, 그야말로 대담한 로맨스를 빚은 것도 그 풍토 때문이었다.
그는 보성에서 한 백정의 딸을 사랑하게 되었다.
청혼하는 양반보다 이 청혼을 받아들이는 백정측이 보다 대담하게 모험을 해야 하며,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화가 풀리고 이장곤(李長坤)을 모시러 오는 대관고작들의 행렬이 이 백정집에 밀어닥치자, 이 백정의 부모들은 나무 위에 올라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이 삼엄한 사회적 단절을 판서 이장곤과 보성의 천한 백정딸은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는 한국인권과 인간사에 가장 큰 뜻을 갖는 희귀한 사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사랑의 승리를 가져다준 차원 높은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이 지역이 <음성우세문화>에서 소외되었던 다행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