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명시/그외 나라

이누이트(에스키모)의 시

높은바위 2025. 6. 22. 06:39

 

굶주림

 

그대, 이방인, 우리의 행복과 태평함만이 눈에 띄는 자여,

우리가 빈번히 겪어야 하는 끔찍한 일들을 안다면

먹는 것과 노래하는 것과 춤추는 것에 대한 우리의 애착을 이해할 것이오.

우리 중에는 하나도 없소,

사냥거리가 없는 겨울을 살아보지 않은 이가,

그런 겨울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소.

우리는 절대 놀라는 법이 없소,

누가 굶어 죽었다 해서――익숙한 일이니까.

그들의 잘못이 아니오. 질병이 닥치기도 하고,

궂은 날씨가 사냥을 망치오,

거센 눈보라가 숨구멍을 감추는 날에는.

 

지혜로운 노인이 스스로 목을 매는 것을 본 적이 있소,

어차피 굶어 죽어가는 몸,

자기 식으로 죽기를 택한 것이오.

그런데 그가 죽기 전 입 속을 물개의 뼈로 채웠소,

그리하면 죽은 자의 나라에서

고기를 배불리 먹을 거라 믿었던 것이오.

 

어느 해 겨울 기근 중에

한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녀 주위엔 배고파 죽어 가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소.

그 아기가 어떤 인생을 이 땅에서 기대할 수 있었겠소?

자기의 엄마가 배고파 피골이 상접한데

그 아기가 어찌 살 수 있겠소?

그래 엄마는 아기를 목 졸라 죽이고 얼도록 내버려 두었소.

그리고는 나중에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먹었다오――

그 일이 있은 후 물개가 잡히고 기근이 끝나,

그 엄마는 목숨을 부지했소.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몸은 마비되었소,

자신의 일부를 먹어버렸기에.

 

그런 일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이 그런 일을 겪었고

극에 처한 인간의 선택을 알기에, 우리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소.

배불리 먹어온 사람이 어찌 굶주림의 광기를 알겠소?

우리는 누구나 그토록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오!

 

 * * * * * * * * * * * * * *

 

Hunger

 

You, stranger, who only see us happy and free of care,

If you knew the horrors we often have to live through

you should understand our love of eating and singing and dancing.

There is not one among us

who hasn't lived through a winter of bad hunting

when many people starved to death.

We are never surprised to hear

that someone has died of starvation--we are used to it.

And they are not to blame: Sickness comes,

or bad weather ruins hunting,

as when a blizzard of snow hides the breathing holes.

 

I once saw a wise old man hang himself

because he was starving to death

and preferred to die in his own way.

But before he died he filled his mouth with seal bones,

for that way he was sure to get plenty of meat

in the land of the dead.

 

Once during the winter famine

a woman gave birth to a child

while people lay round about her dying of hunger.

What could the baby want with life here on earth?

And how could it live when its mother herself

was dried up with starvation?

So strangled it and let it freeze.

And later on ate it to keep alive--

Then a seal was caught and the famine was over,

so the mother survived.

But from that time on she was paralyzed

because she had eaten part of herself.

 

That is what can happen to people.

We have gone through it ourselves

and know what one may come to, so we do not judge them.

And how would anyone who has eaten his fill and is well

be able to understand the madness of hunger?

We only know that we all want so much to live!

 

 * * * * * * * * * * * * * *

 

* 인디언 문화를 보존하는 데 관심이 많던 미국의 한 문화인류학자가 황량한 광야에 거주하는 어느 부족을 찾아가 그들의 노래를 채록했다고 한다.

많은 노래를 경청하며 그것을 옮겨 적던 이 학자는 그들이 들려준 노래들 속에 특이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많은 노래들이 물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구름의 노래, 천둥의 노래, 비의 노래, 샘의 노래 등등.

이를 흥미롭게 여긴 학자가 그 이유를 묻자 추장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 불모의 땅에서 수천 년간 살아온 우리에게, 늘 부족했던 물은 바로 생명과 같았기 때문이오."

학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추장은 그에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도 당신네 백인들의 노래에 관심이 있어서 좀 들어보았는데 온통 사랑에 관한 것들이더군요. 아마 당신들에게는 사랑이 부족했던가 봅니다."

 

 「굶주림」은 자신들의 삶을 이국적인 눈요깃거리로밖에 보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겨냥한 이누이트의 시다.

이 시에서 이누이트의 노래와 춤은, 한편으로는 몸서리쳐지는 고난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어져야 하는 삶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이누이트의 목소리와 몸짓은 구경꾼의 자기중심적 쾌락의 대상일 뿐이다.

첫 행에서 화자가 이방인이 자신들의 “행복과 태평함만” 본다고 한 것은 시 전체에 담담히 흐르고 있는 항변의 전조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삶에 대해 애초부터 무관심한 이방인의 느긋한 마음가짐을 집어내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참여가 배제된 바라봄은 근사하게 말하면 관조이지만 냉소적으로 말하면 관광일 뿐이다.

 

  시의 초반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아마 "우리는 절대 놀라는 법이 없지, 누가 굶어 죽었다 해서--익숙한 일이니까"일 것이다.

그렇게 놀라지 않고 익숙하게 된 것은 그 죽음이 불가해한 자연에 의해 온 것이지 인간에 의해 야기된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움켜쥐고 쌓아놓는 인간에게 내리는 죽음보다 무서운 신의 저주이다.

 

물개의 뼈를 입에 가득 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인이 지혜로운 자였다는 이야기는 이 시의 가슴 아픈 역설 중의 하나이다.

지혜로운 자가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는 것이 그렇고, 죽음의 앙상한 상징인 뼈에 저승에서는 생명의 살이 붙기를 바라는 노인의 심정이 그러하다.

뼈를 입에 물고 죽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원한 굶주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이승에서의 애처로운 갈망이 저승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인가.

 

  갓 태어난 자신의 아기를 죽이고 나중에 그것을 먹어야 했던 여인에 관한 이야기는 앞선 노인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처연하지만 눈물을 흐르게 하지는 않는다.

흐르기 전 얼어붙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아기를 죽인 것이 아니다.

배고픈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배고픔을 느끼기 전에 배고픔이 없던 곳으로 되돌려 보낸 것이다.

엄마의 마음에 아기가 떠난 곳은 물개의 뼈를 입에 물고 갈 필요가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아기의 살을 통해 목숨을 부지한 엄마의 몸이 결국 마비된 것에 대해 시인은 여인이 "자신의 일부를 먹어버렸기 때문에"라고 쓰고 있다.

이는 결코 죄 값을 치렀다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몸의 일부를 해쳤다면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화자가 사는 곳은 그런 극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곳이다.

극도의 굶주림 앞에 법, 윤리, 도덕은 무참하게 무너진다.

사흘을 굶은 이의 도둑질은 도둑질이 아닐 수 있는 이유이다.

살고 싶은 욕망은 고귀한 것이다.

 

  「굶주림」이 쓰인 지 얼추 백 년가량이 흘렀다.

이제 이누이트에게 더 이상 굶주림은 없다.

그들은 더 이상 이글루에서 살지 않으며, 더 이상 물개 사냥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디에 선가는 매일 25,000여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 혹은 굶주림과 관련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더 슬픈 사실은 이제 시인들이 좀처럼 굶주림에 대한 시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 백정국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