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유몽인(柳夢寅)은 한편의 시(詩)로 죽었다

높은바위 2025. 4. 11. 06:46

 
류몽인(柳夢寅, 1599년 ~ 1623년 8월 30일=음력 8월 5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어우당(於于堂) 그는 한성부좌윤, 대사간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학가이다.
어우야담(於于野談) 등 명저를 남긴 조선시대 민중의 이야기꾼, 유몽인은 한편 시(詩) 때문에 죽음을 당한,
한국에서 선비들이 어떻게 죽어 갔는가의 한 유형을 제시한 죽음을 죽은 분이다.
 
그는 인조반정 후 기자헌(奇自獻)과 유경종(柳敬宗) 부자가 기도한 반쿠데타에 혐의를 받고, 망명생활을 하다가 양주(楊州) 서산(西山)에서 잡힌 몸이 되었다.
그는 혐의를 따지는 국문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광해가 꼭 망할 것은 부인이나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일이었고, 새 임금의 거룩한 덕은 천한 종들도 아는 일인데, 내가 어찌 성군을 버리고 못난 임금을 복위시킬 뜻이 있었겠소. 그리고 날더러 망명했다고들 하는데, 망명한 것이 아니고 서산에 갔던 것뿐이오."
 
이제 조정에서는 모역의 음모보다 왜 반정 후 새 임금에 출사(出仕) 하지 않았느냐에 초점을 잡았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은 것이다.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면,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서산에 들어갔겠느냐."
그는 한동안 묵묵히 대꾸 없이 있다가, 
"내가 전에 상부사(孀婦詞)를 지어서 내 뜻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다."하고 그 시를 외웠던 것이다.
 
일흔 살 늙은 과부
단정히 빈방을 지키고 있네
옆 사람들 시집가라고 권하길
선남(善男)이란 무궁화 같이 고운 거라고
예 어진 여인들의 시를 외우고 있어
문왕 무왕의 어진 어머니들 부덕을 알고 있는지라
흰머리에 젊은 태로 꾸민다면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무궁화 같은 얼굴의 선남'은 인조를, 개가를 거절하는 늙은 과부는 유몽인 자신을 상징하는
이 시에는 반정으로 수립된 인조의 새 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또렷이 담겨 있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를 두고 논의가 벌어졌다.
연파(軟派)에서는 한국의 도의상 악주(惡主)일지라도 절의를 지키는 것은 장한 일이니 죄를 묻지 말자 하였고.
경파(硬派)에서는 이 시로써 불사의 뜻이 완연하니 유몽인을 죽이지 않으면 나쁜 본을 보아 조정에 나오려 하지 않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니, 뚝을 쌓아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우겼다.
이 후자의 논의는 한국의 모럴에 일대 변혁된 사상의 발로임을 본다.
 
중종반정 때 연산군에게 절의를 지킨 홍언충(洪彦忠) 등 김숭조, 남세주, 유기창 등은 높이 평가되었고, 또 유가(儒家)에서도 그 절의를 극찬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몽인에게는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베어 죽였던 것이다.
―유몽인의 죽음은 역모(逆謨)한 사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상부사(孀婦詞) 한 편 때문이었다.
당시의 대신들 간에는 살려주자는 의논이 있었지만, 여러 반정훈신(勳臣)이 뒷날의 폐단에 관계된다고 하여 죽였다.
 
유몽인이 신원(伸寃)된 것은 170여 년 뒤였다.
정조는 그의 문장과 절개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