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수크(Nakasuk)의 이누이트 시
보이지 않는 사람들
우리 주위를 그림자처럼 떠도는
보이지 않는 부족 사람들이 있지? 그자들을 느껴본 적 있어?
그들은 우리와 같은 몸을 갖고 그저 우리네처럼 살아.
같은 종류의 무기와 연장을 쓰면서.
눈 위에 남겨진 그들의 자취가 가끔 눈에 띄고
그네들의 이글루가 보일 때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 사람들을 절대 볼 수는 없지.
죽을 때를 빼놓곤 보이지 않아.
죽을 때는 모습을 드러내니까.
한 번은 인간 여인이
보이지 않는 부족 사나이와 결혼을 했지.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남편이었어.
사냥을 나가면 식량을 갖고 아내에게 돌아오고,
여느 부부처럼 얘기도 나눌 수 있었지.
그런데 아내는 자기가 결혼한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어.
내외가 모두 집에 있던 어느 날
아내는 남편을 보고 싶은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남편이 앉아 있다 여겨지는 허공에 칼을 꽂았어.
그러자 소원이 이루어졌지.
아내의 눈앞에 근사하게 생긴 청년이 땅바닥에 고꾸라졌던 거야.
하지만 남편은 차디찬 주검이었고, 너무 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여인은
가슴이 터지도록 슬피 울었어.
보이지 않는 부족 사람들이 살해 소식을 듣고
앙갚음하기 위해 이글루에서 나왔어.
공중에서 활이 움직이고
화살이 목표를 향해 활시위에서 당겨지는 것이 보였지.
인간들은 무력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어.
덤벼드는 자들이 보이지 않으니
뭘 해야 할지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했던 거야.
그런데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겐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적수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싸움의 예법이 있었지.
그래서 그들은 화살을 날려 보내지 않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어. 아무런 싸움도 없이
모두 자기 일상으로 돌아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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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nvisible Men
There is a tribe of invisible men
who move around us like shadows? have you felt them?
They have bodies like ours and live just like us,
using the same kind of weapons and tools.
You can see their tracks in the snow sometimes
and even their igloos
but never the invisible men themselves.
They cannot be seen except when they die
for then they become visible.
It once happened that a human woman
married one of the invisible men.
He was a good husband in every way:
He went out hunting and brought her food,
and they could talk together like any other couple.
But the wife could not bear the thought
that she did not know what the man she married looked like.
One day when they were both at home
she was so overcome with curiosity to see him
that she stabbed with a knife where she knew he was sitting.
And her desire was fulfilled:
Before her eyes a handsome young man fell to the floor.
But he was cold and dead, and too late
she realized what she had done,
and sobbed her heart out.
When the invisible men heard about this murder
they came out of their igloos to take revenge.
Their bows were seen moving through the air
and the bow strings stretching as they aimed their arrows.
The humans stood there helplessly
for they had no idea what to do or how to fight
because they could not see their assailants.
But the invisible men had a code of honor
that forbade them to attack opponents
who could not defend themselves,
so they did not let their arrows fly,
and nothing happened; there was no battle after all
and everyone went back to their ordinary l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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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는 것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손길이 없었다면「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오래전에 눈보라 속에 잊혀졌거나 아니면 적어도 현재의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 투명인간 이야기는 흔히 에스키모라고 알려진 이누이트족에게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20세기 초 북극 탐험가 크누드 라무센에 의해 내러티브 형태로 채록되었다가 나중에 에드워드 필드라는 시인의 손에 의해 현재와 같은 영시의 형태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시인이며 문화인류학자인 제롬 로덴버그가 편집한『호박 흔들기: 북미 인디언의 전통시가』에 실리면서 지적(知的)인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시의 작가가 나카수크로 기록된 것은 다분히 편의적인 것이다.
이누이트족의 구전 집단 창작물이 영어로 채록되는 과정에서 나카수크란 인물이 담당했던 전달자의 역할에 서구 출판문화의 저자 개념이 덧입혀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떻든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시는, 분명 이제껏 다루었던 시와는 여러 모로 다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야기에서 감지되는 존재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우리가 아는 동서양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서양적인 사유는 추상적인 현상을 물질적으로 구상화하는 쪽으로, 동양적인 사유는 물질적인 구체성을 추상화하는 쪽으로 흘러왔다고 할 때, 이 시에서 발견되는 것은 구상과 추상, 물질과 현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구분 자체를 무너뜨리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세계다.
그러나 이 생소한 세계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커다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또한 이 시의 매력이다.
시인은 당혹스러워하는 독자에게 "이런 이야기가 낯설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신이 모른다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라고 나직이 타이르는 듯하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시각적 확신을 절대적인 판단 근거로 생명의 존재여부와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못된 습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눈으로는 그 흔적만을 추적할 수 있을 뿐 그 실체의 본질을 알기 힘든 종족이 우리 곁에 있다는 귀띔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투명인간들은 특이하게도 죽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음에서 보임으로의 변화가 죽음으로 매개되는 이 부족의 기이함은 우리가 존재를 인식하는 통상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전복시킨다.
우리는 보여야지 존재하는 것이고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하다.
죽음은 보이지 않게 됨이다.
그런데 시에 등장하는 이 신비한 부족은 보이지 않을 때가 생존의 순간이고 보일 때가 죽음의 순간이다.
보이는 여인과 보이지 않는 사나이의 결혼은 따라서 본질적인 존재형태가 상반되는 두 공동체의 잠재적으로 불안한 동거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야기의 화자는 이 둘의 결혼 생활이 어느 순간까지는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 행복이란 여인이 남편의 이질적인 존재방식을 있는 그대로 수용했을 때 가능한 행복이다.
그런데 그 행복은 아내가 남편을 찌르는 순간 안타깝게도 깨지고 만다.
여인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물론 죽음과 바꾸더라도 남편의 얼굴을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여인의 이기적인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는 여인이 자신이 저지를 행위의 비극적 종말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여인은 "존재하는 것은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지 모른다.
어쩌면 여인은 날카로운 쇠붙이가, 가늠하기 힘든 남편의 투명한 비존재에 존재가치를 부여해 줄 것으로 착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여인은 자기 방식대로 남편을 "살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정한 깨달음의 순간은 늘 더디게 찾아온다.
여인이 통곡하는 순간, 시는 하고픈 이야기를 다 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 지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고 해도 크게 문제 삼을 비평가는 없을 것이다.
서양문학에서 말하는 클라이맥스 이후의 데뉴망이 뚜렷이 선포된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또 한 번의 클라이맥스와 또 한 번의 데뉴망을 예비해 두고 있다.
여인의 미워할 수 없는 공격성으로 촉발된 사건은 이 부부가 각각 속한 부족 간에 생사를 가로 짓는 전면 전쟁의 가혹한 불씨가 된다.
그러나 앞선 두 연이 독자의 세련된 이성을 표류하게 만들었듯이, 마지막 연은 독자의 예상을 배반하고 보이지 않는 부족의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면모를 매우 극적으로 펼쳐낸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읽었을 때, 여인이 속한 부족과 남편이 속한 부족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약자와 강자의 관계이다.
상대는 나를 볼 수 있는데 나는 상대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싸움터에서 치명적으로 불리한 조건이다.
여인의 부족이 이글루에서 뛰쳐나온 살기등등한 전사들 앞에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족의 전사들은 무기를 거두어들인다.
열등한 조건을 가진 상대는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싸움의 "예법"에 순종하는 물러섬이다.
기득권을 포기함으로써 절망하는 적수를 끌어안아 버리는 관대함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역시 생소한 결말이다.
시의 끝자락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보이는 부족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부족 사람들의 이런 마음의 변화를 과연 알았을까?
왠지 몰랐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싸움의 "예법"을 떠벌이지 않고 지키는 것이 진정한 강자의 모습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 백정국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