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계(空房戒)와 소녀
이조 중엽에 <공방계(空房戒)>라 하여, 한국선비의 한 시련의 도풍(道風)이 은밀히 유행했었다.
서경덕(徐敬德)의 유교도교(儒敎道敎)의 융합사상이 빚은 수도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 계(戒)는 기생(妓生)과 이불을 같이 한다든지, 또 처첩1비(妻妾一婢)와 이불을 같이 함으로써 본능을 극도로 달구어 놓고, 교접을 않음으로써 양성(養性)한다는 자학수도(自虐修道)다.
처첩과의 공방계는 1년 내지 3년의 기간을 정해놓고 이 계행(戒行)을 하곤 하였다.
이 공방계는 그 후 타락하여 양반들이 천녀나 천첩과 교합할 때 그 잉태를 기피하기 위한, 피임법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양희수(楊希洙)의 공방계는 이색적인 것이었다.
성종(成宗) 때 영암군수(靈岩郡守)였던 양희수(楊希洙)가 임지로 가는 도중, 장성(長城) 땅에서 있었던 일이다.
주막이 없어 점심을 거르고 허기져 노변에 누워있는데, 한 소녀가 자기 집에 불러들여 따습게 밥상을 차려들였다.
양희수는 이 장교(將校=巡警순경)의 열두 살 난 딸의 소행이 기특하여, 답례로써 예쁜 청선홍선(靑扇紅扇=부채) 두 개를 주었다.
이 타의 없는 선물이 당시 모럴풍토에서는, 한 소녀의 운명을 결정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붉고 푸른 아름다운 부채를 받고 기뻐했을 소녀에게, 그의 부모나 마을 어른들은 원이 소첩을 강요하는 한 신물(信物)로 인식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소녀에게 신물을 들려, 원과 해로하라고 내어 쫓았다.
양군수(楊郡守)는 뜻밖의 방문을 받고, 신물이 아님을 설득하였으나 결국 사회인식이 그 진의를 알아줄 리가 없고, 따라서 이 소녀는 설득만으로는 구제받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소첩(小妾)으로 들인 것이었다.
그리고 50이 넘은 양군수(楊郡守)는 수도도 아니고 또 서출이 두려운 것도 아닌 양심의 <공방계(空房戒)>를 이 소첩으로 하여금 시행하였다.
양희수는 근 10년의 공방계행을 하였고, 그 소녀는 처녀처(處女妻)로 치가(治家)를, 그리고 처녀모(處女母)로써 치문(治門)을 잘하여 가문에서 소문이 났다.
양희수의 파계는 이 훌륭한 처녀처에 대한 속죄의식에서였다.
그 파계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데리고 적서(嫡庶)의 차별에서 때 묻히고 싶지 않아, 이 소첩은 서울 자하(紫霞) 골에 별거(別居), 글을 가르쳤다.
그 아들들이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의 명인 양사언(楊士彦)과 역시 명사인 양사기(楊士奇=府使부사)이며,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양희수가 죽었을 때, 그 영구(靈柩) 앞에서 비수를 빼들고 자결하였다.
죽으면서 남긴 말은 적서(嫡庶)의 차별에 대한 원망이며, 이 유언에 따라 그 형제는 적적(嫡籍)에 올랐고, 이 장성여인(長城女人) 은 죽음의 승리를 거둔다.
한국여성 수난사를 이 소녀에게서 보며, 남녀 간에 선물에 깃들인 한국학을 이에서 보며, 적서차별을 한 비장한 투쟁의 한 양상을 이에서 본다.